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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의 Oct 27. 2024

관계

온 마을이 필요하다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언어, 두발걷기, 도구 사용, 고지능이 가장 먼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아기 시절이 터무니없이 무력하다는 것이다. 신생아는 먹는 것, 싸는 것, 자는 것도 일일이 돌봐줘야 한다. 게다가 성장도 느려서, 다 키워서 독립시키려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양육자가 ‘투자’를 엄청나게 많이 해야 하는 까다로운 유년기를 보내는 동물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다양한 양육 전략이 발달했다. 대표적인 것이 공동 양육이다. 가장 생물학적으로 가까운 종족인 침팬지가 암컷이 아기를 전담하는 것과는 달리, 아버지가 양육에 많이 관여하는 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요즘 몇 년 사이에 가정적인 아버지상이 유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백만년 단위의 시간을 관통하는 인류학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호모 사피엔스 엄마들은 아빠로도 부족해서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 손위형제 및 이웃들과 도움을 주고 받는다. 이렇게 밀접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아기를 길러내는 것은 인간의 독특한 점이다.

   

돌봄뿐만 아니라 아이의 성장 과정에 필수적인 놀이와 모방도 사회적인 학습 과정이다. 아이들은 또래 속에서 자연스럽게 집단의 규칙을 학습하고, 서로에게 역할을 부여한다. 아이들은 나름의 문화를 형성하며, 때로는 갈등이 벌어지고 이를 봉합하는 방법을 배운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집단에게는 모방을 통해서 각종 스킬을 연마할 기회가 반드시 필요한데,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확대 가족이 지식과 문화를 전수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인간 특유의 길고 긴 유년기는 고등 동물 특유의 성장과 학습, 더 나아가 그러한 이륙 준비를 가능하게 하는 풍부한 인적 자원으로 유지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사람은 집단과, 그 집단 속에서 중첩되는 관계가 없다면 태어날 수도, 자라날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장기간 지속되는 짝을 맺고, 엄마와 아기라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양육 공동체를 형성하고, 아이가 놀이와 모방 속에서 사회성을 훈련하는 모든 과정이 그렇다.     


인류의 뇌가 폭발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이 복잡한 사회 관계를 처리하기 위해서라는 의견이 있다. 일리가 있다. 수렵채집인에게는 타인이 냉장고이고, 통장 잔고이고, 부동산이었을 것이다. 사냥한 음식은 곧 썩어버리고 재산은 따로 모을 수 없으며 거주는 일정하지 않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보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인간 관계는 집단 안에서 지속된다. 이웃에게 음식을 나눠주면, 그가 기억하고 다음에 내가 곤궁할 때에 먹을 것을 건네줄 것이다. 위협적인 들짐승을 몰아내려면 여러 명의 힘이 필요하다. 아기를 돌보고 교육시키는 일도 대가족에게 의지한다. 그리고 이 사적 네트워크는 때때로 갈등이나 오해를 처리해야 하고, 도움을 받았으면 보답하는 유연함이 전제되는 실물 세계의 관계이다.      


반면 현대에는 현실에서 구현되는 사적 관계가 희박해졌다. 이제 냉장고는 냉장고고 통장은 통장이고 부동산은 부동산이다. 과거에는 나와 관계 맺은 인간만이 해결해 주던 수많은 과제들을 자본과 계약, 기술이 대리해준다. 참으로 편리한 일이다. 사실 인간 관계에선 구질구질하고 볼 품 없는 일도 많이 생긴다. 귀찮아도 서로의 대소사를 신경써야 하고, 못마땅한 참견도 오고 가게 된다. 이제 우리는 관계와 갈등 관리에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다. 상당수의 현대인은 대도시에서 익명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내 이웃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잘 알지 못하며, 가족들과도 멀리 떨어져 지내기 일쑤다. 미디어로 인한 개인의 분절화는 극단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사적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도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진 만큼, 더 이상 타인은 과거만큼 존귀하지 않다. 때로는 더 나아가 배척과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 결과 현대인이 사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유지하는 일은 그만큼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런데 앞서 서술하였듯, 출산과 양육은 대단히 강렬한 관계성 속에서 돌아가는 일이다. 파트너쉽, 모자관계, 양육과 성장에는 타인이라는 토양이 필요하다. 아기가 씨앗이라면, 이 씨앗은 사람들 속에 심어야 싹을 틔운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에서의 악수와 미소를 SNS의 ‘좋아요’로 대체하는 것에 익숙하다. 가상 세계에서의 관계도 의미가 있으나, 실질적으로 양육에 도움을 주고 받거나 또래의 놀이 집단을 이루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깝고, 상호 신뢰가 쌓인 호혜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냉장고 하나를 사들이는 것처럼 소비로 간단히 대체할 수 없다. 이 모든 관계와 연결성이 빈약한 환경에서는 자연히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에 장벽이 하나 더 생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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