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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의 Oct 27. 2024

틈새 메꾸기

설명과 동의

인류는 개인에게 보장된 권리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진일보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개인성, 자율성, 독자성에는 재생산의 근본적 성질과 얼마간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 짝을 맺고 2세를 낳는 일에는 상호 간 양보가 필연적이고, 철저히 논리적인 방식을 따르지도 않는다. 육체적 부담을 반반씩 나눌 수도 없고,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 예측하는 것은 들어맞지도 않는다. 임신을 하면 내 몸뚱아리를 타인과 완전히 공유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아기를 낳고 기르는 일이야말로 자율을 한없이 침범당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누려 마땅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확장될수록, 하필이면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기원으로부터 우리의 정신세계가 동떨어지게 된다. 우리가 과학 문명사회로 이룩한 예측도와 통제성이 높아질수록, 육아는 더욱 혼란스럽고 골치 아픈 일이 된다. 우리나라가 특출 나게 유난스럽긴 하지만, 다른 나라들도 차츰 저출산 현상을 겪고 있다. 아마 사회가 더 고도화될수록 저출산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문명을 퇴보시킬 수도 없고, 출산의 속성을 갑자기 뒤집을 수도 없다. 여성 인권을 후퇴시키거나, 문맹률이 높아지면 출산율이 증가할 것이라는 과격한 주장이 있다. 그 결과는 맞을지언정,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국가 주도의 온갖 출산 장려 캠페인은 젊은이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일쑤다. 피임을 못 하도록 자유를 억압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대로 아무 방법이 없는 것일까? 정녕 우리는 이대로 한국인 절멸의 시대를 맞아야 할까?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보자. 지금부터는 나에게 익숙한 병원의 용어를 빌려 오겠다. 첫 번째는 '설명과 동의'이다. 입원 치료를 받아본 사람이라면 병원에서 복잡한 양식의 '동의서'를 작성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투자를 할 때도 온갖 서류에 사인을 해야 되는 것처럼, 이런 문서에는 온갖 악결과가 발생할 수 있음이 빼곡히 적혀 있다. 이 종이뭉치에 동의하다 보면 환자 입장에서 다소 기분이 나빠질 때도 있다. 치료 중에 이러저러한 부작용이 생겨도, 의사가 책임을 안 진다는 면피 증명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생 가능한 부작용에 대해서 고지하는 것의 더 중요한 목적은, 그 치료의 순응도와 환자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다. '이 주사는 아플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다음 날이 되면 좋아질 겁니다.' '이 치료는 여러 차례 반복해야 할 수도 있어요. ' '이 시술을 받고 나면 간혹 부작용이 발생하는데,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이런 것이 있어요.' 이런 정보를 미리 알고서 환자가 능동적으로 치료에 참여하는 것과, 기계적이고 피동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치료의 효과나 과정이 현저히 다르다.     


주사가 아플 것이라는 설명은 주사가 유발하는 통증에 아무런 객관적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하지만 환자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정보(“주사가 아플 것이다”)가 입력된다면 그것이 '새로운 규칙'이 되기 때문에, 통증을 예상한 입장에서 보다 수월히 견딜 수 있다. (간혹 가다가 그 정보 때문에 지나치게 긴장하는 환자도 있지만, 고지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은 예측 불가능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부분적으로라도 예측과 통제 가능한 범위를 설정하고 그것을 납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애 낳고 키우는 일에는 특별한 규칙이 없어요.’라는 가짜(?) 규칙일 지라도 유용하다.   

   

우리가 상황을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가짜 규칙에 얼마나 열광하는지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예시는 출산을 둘러싼 온갖 전통적 금기와 미신이다. 사소한 우연도, 산발적 불행도 일단 규칙을 부여하면 불확실성이 종결된다. 현대 의학 태동 이전, 출산은 유독 예측이 어려웠다. 도대체 임신을 하기는 한 것인지, 태아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애가 건강하기는 한 것인지... 알 방법이 하나도 없었던 과거의 사람들은 확실성 갈증에 목이 타들어갔다. 인과 추종 기계인 사람의 뇌가 해결사로 등장할 시간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미신이 등장해서 법칙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맞건 틀리건 별로 상관 없다. 덕분에 인지적 종결 욕구가 충족되니, 마음은 편안해졌을 것이다.     


이제 알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졌다. 나눌 수 있는 경험도 더 풍부해졌다. 미신같은 가짜 규칙이 아니고 진짜 현실을 들여다볼 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재생산은 유독 베일에 싸여 감춰진 이야기가 많아서 '설명과 동의'가 원활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제대로 논하지 않다 보니,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해 균형 잡힌 고찰이 부족하다. 때로는 그저 동물적 본능으로 치부해 격하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괜스레 애 낳느라 몸매 망가진다며 질색하기도 한다. 나는 임신과 출산에도 솔직하고 풍부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출산의 배신』을 쓰게 되었다. 이제는 동류의 담론이 더 많아지길 기대하고 있다. 뿌리 세계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하고, 들여다보자. 재생산의 불확실성, 육체성, 이를 둘러싼 인간의 근본적 본성이 시야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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