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지의 Oct 27. 2024

틈새 메꾸기 2

농부와 어부

두 번째는 '근치 치료'이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에 걸려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고열과 인후통 때문에 몹시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증상들 때문에 우리는 해열제나 진통소염제를 복용한다. 이 약들이 열과 통증 같은 증상을 완화시켜 줄 것이다. 그런데, 해열제나 진통제가 감염의 실제 원인인 '코로나 바이러스'를 근본적으로 치료하지는 않는다. 이런 접근을 '대증 치료'라고 부른다. 증상에 대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근치 치료'는 피상적 현상이 아닌, 근본적 원인에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저출산 대책도 대증 치료와 근치 치료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사교육비 부담은 많은 사람이 꼽는 저출산 원인이라 예로 들어보겠다. 정부에서 사교육비 부담 완화를 위해, 부모들에게 '사교육비 지원금'을 나눠준다면 어떨까? 대증 치료일까, 근치 치료일까? 대증 치료에 불과하다. 앞선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녀의 적합도 상승을 위한 서열 경쟁에 뛰어든 부모는 이미 그 목표에 최대치의 자원과 노력을 쏟아붓는 중이다. 그 와중에 자원의 양을 증가시킨다면, 그저 투입되는 사교육비의 총량이 증가할 뿐이다. 경쟁 완화와는 상관이 없으므로 근치 치료가 아니다. 물론 대증 치료가 늘 무의미하지는 않으나, 때로는 언 발에 오줌 누는 꼴이 될 수도 있다.      

근치적 치료는 다르다. 우리는 햇빛 세계와 뿌리 세계의 특성에 대해서 파악했으니, 그 낙차를 조금씩 줄일 방법도 떠올려 볼 수 있다. 재생산 경험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통제와 자율, 명료한 규칙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갈등이 시작한다. 이상과 현실 간 격차를 줄이는 것이 목표이다. 그렇다면 근치적 접근에도 하나의 의문점이 남는다.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 위해서 뿌리와 잎새, 어느 쪽이 양보해야 할까? 임신과 출산, 아기 양육을 엄정한 이성적 잣대로 해석하고 예측, 통제력을 확보하는 것이 좋을까? 혹은 가임 세대가 일방적으로 자율을 포기하고 신체와 미래의 불확실성을 감당하는 것이 좋을까?     


물론 정답은 그 중간 어디즈음에 있을 것이다. 나는 거시적 차원에서는 햇빛 세계의 이상을 추종하고, 미시적 차원에서는 뿌리 세계의 특수성을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거주, 일-가정 균형, 생업과 같은 중대한 문제에서는 개인의 통제성과 자율권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돕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먹고 사는 필수적인 일조차 그대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선뜻 뛰어들 용자는 드물다. 가족과 충분히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원할 때 복직이 가능한 직장처럼 우호적인 노동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근치적 차원에서 현금 살포보다 더 효용이 크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출산 휴직과 복직을 보장하는 제도는, 출산으로부터 파생하는 직업적 불확실성을 줄여 주는 효용이 있을 것이다. 아빠의 육아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정책은, 엄마가 혼자만 재생산을 전담한다는 불공정의 감각을 해소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과 노인을 비롯하여 약자를 두루 배려하면, 재생산 시기의 육체적 취약성을 더 수월하게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과열된 경쟁의 밀도를 완화한다면, 애 낳고 기르는 일 특유의 비경제성을 젊은 세대가 조금 더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미시적 차원에서는 약간의 불확실성과 통제 불능성을 수용해야 한다. 이것은 잎새와 뿌리가 농부과 어부처럼 다른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는 점에서 불가피하다. 바다는 단단한 육지와 달리 풍랑이 몰아치고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다. 변덕이 심한 바다에서 어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유감스럽지만!) 정신 세계를 조금 수정해야 한다. 최고의 사주팔자에 맞춰 아기를 낳겠다든지, 분유 섭취량을 밀리리터 단위로 일일이 제어하겠다든지, 몇 개월부터 하루에 영단어를 몇 개씩 외우게 할지 집착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기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키우는 일은 어차피 썩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준비한다고 다 대비되지도 않고, 궁금하다고 다 알아낼 수도 없고, 제어한다고 다 이뤄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조금은 느긋하고, 약간은 내려놓는 것이 꽤나 도움이 된다. 그래야 험한 대양에서 파도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목적지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양방향 타협이 가능하려면, 출산으로 가는 길에 놓인 커다란 불확실성과 치명적인 위험은 최대한 사회가 두 팔 걷고 나서서 관리해야 한다. 거시적 차원에서 외부적 조건을 갖추는 것은 먼 바다로 나갈 항해에 필요한 튼튼한 배와 믿을 만한 동료 선원을 얻는 것과 비슷하다. 미시적 차원에서 뿌리 세계에 적응하는 것은 개인이 노련한 항해술,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갖추는 것과 비슷하다. 선박과 동료라는 조건이 갖춰져도, 결국 먼 바다를 헤치고 나가는 것은 당사자의 몫이다. 바다는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밟고 디딜 단단한 땅이 있는 육지와 다르다. 농부의 세계관을 어부의 세계관으로 조금씩 조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세계관 조정이라, 그럴듯하게 들리는가? 국가 규모의 복지 정책, 모성 관련 지출 항목을 손보는 것보다 간단해 보이는가? 흠, 글쎄다... 내 생각엔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