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적 같지만 최적이 아닌 최적의 역설
빛 세계의 꽃은 고효율, 최적화로 나타난다. 특히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는 부지런히, 열심히 살아야 효능감을 느낄 수 있다. 이른바 ‘갓생’으로 대표되는 생산 지향적 토양이다. 하지만 아기 낳는 것은 정확히 그 반대 지점에 있다. 재생산(임신-출산-육아)은 비생산의 극치이다. 출산 전후의 노동자는 기성 직업 세계에서 최적의 생산성을 발휘하기 힘들다. 임신과 함께 짤리지나 않으면 다행인 직장이 아직도 많다. 매 시간 돌봐줘야 하는 갓난아기를 두고 자기 계발은 어림도 없다. 게다가 육아란 효율은커녕 돈 쓰기만 하는 활동이다. 돌봄에 아무리 공을 들여도 품삯이 돌아올 리가 없다. 영 수지타산이 안 맞는 일이다. 우리가 사는 물신주의 사회에서 재생산은 비생산, 비효율로 점철된 사치일 뿐이다.
재생산도 엄연히 생산이다. 번식으로 태어난 존재들이 번식을 통해 새로운 개채를 만들어내니 '재생산'이라고 일컫는다. (생물학 영역에서의 reproduction - 재생산 혹은 생식으로 번역된다.) 출산이 생명의 역사에서 딱 한 번만 일어난 일이라면 접두사 're'가 붙지 못했을 것이다. 생식으로 태어난 존재들이 또다시 생식을 하면서 생명의 사슬이 이어져 왔기에 '재'생산인 것이다. '생산직' 부모들에게서 태어난 우리들도 잠재적 '생산직'이다. 생명은 그다음 생명을 예비하는 속성을 가진다.
최적화는 햇빛 세계의 꽃과 같지만, 뿌리 세계에는 해로울 때도 있다. 원래 최적화란 미적분에 근거한 개념이다. 방정식에 근거해 최소값 혹은 최대값을 산술적으로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출산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 변수는 실시간으로 변화하기에 딱히 고정된 산술식이 없다. 애초에 재생산을 단일한 방정식으로 환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차원의 최적을 추구한다. 이를테면 ‘최적의 시기’에 출산을 원하는 사람들은 돈을 더 모으거나, 새로운 거주지를 구하거나, 출산 휴가가 용이한 직장으로 이직을 준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출산에는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시기가 정해져 있다. 탐색과 준비에 소요하는 시간 그 자체도 이미 자원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최적을 추구하는 와중에 최적 시기를 지나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무자녀 상태로 고착되게 마련이다.
최적의 희소함도 역설적으로 작동한다. 최적은 근본적으로 선택의 가짓수를 줄이는 방향이다. 최적의 출산, 최적의 육아가 여러 가지 존재할 리가 있겠는가? 복수의 방안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최적이 아니다. 최적의 가짓수는 하나, 혹은 지극히 적을 수밖에 없다. 고효율을 추구하는 산업 공정에서라면 최적 지점에 안착하는 것이 사리에 맞겠으나, 인간을 새로 만드는 일은 기계 작업이 아니다. 생명체는 초기 생성 단계에서부터 약간의 오류 가능성, 사소한 낭비와 애매한 불합리, 궁극적으로 그에 기인한 다양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지나치게 경직되고 균질한 체계는 생명과 어울리지 않는다.
삶의 모든 차원에서 ‘최적 추구’가 당연해 보이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진화생물학 탓일지도 모른다. 진화론의 모토, 적자생존! 듣기만 해도 삼엄한 이 구절은 행여나 내가 한 뼘만큼이라도 뒤처지면 입을 쩌억 벌리고 있는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할 것처럼 들린다. 이런 무시무시한 법칙이 자연계를 지배한다니, 더더욱 최적화 경쟁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물의 진화는 그렇게 단선적이지만은 않다. 진화를 위해서는 변이가 있어야 하는데, 변이가 있으려면 돌연변이와 같은 우연이 작동해야 한다. 오류와 불확실성은 최적과 가장 거리가 먼 사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생명 다양성의 핵심이 된다. 생명 활동이 오롯이 최적화에만 몰두했다면, 인간 같은 고등 동물은 생기지도 않았을 뿐더러 유성 생식은 에너지 낭비에 불과한 쓸모없는 일이 된다.
완전히 최적화된 체계는 혼돈의 가장자리로 밀려날 때 티핑 포인트로 넘어가 연쇄반응을 일으킬 가능성이 더욱 크다. 반대로, 복잡계를 최적화보다는 유연함에 더 가깝게 설계하면 회복력이 더 높다.
『어떤 일은 그냥 벌어진다』 - 브라이언 클라스
나는 오늘도 내일도 쓸모없고 비효율적인, 무용한 일들을 반복하는 아기 엄마다. 아기가 잠들 때까지 하염없이 등을 토닥이고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준다. 아기와 몇 시간이고 오솔길에 쭈그려 앉아 개미떼를 바라본다. 이게 뭐냐고 수십 번 물어봐도 수십 번 대답을 해주고, 잘 먹지 않는 밥일지언정 정성껏 차려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이, 포유류가, 생명체가 그런 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재생산은 본디 최적화와 고효율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