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달콤한 약속
첫 임신은 누구에게나 굉장히 생경한 경험이다. 알아봐야 할 것도 많고, 사야 할 것은 더욱 많다. 그전까지는 비슷한 일과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대체로 일상이 유지되었는데, 이제부터는 매일 매일이 다르다. 출산 준비물은 어떤 것이 필요할까? 임산부를 위한 정부 지원에는 뭐가 있을까? 아기 침대는 어떤 종류가 좋을까? 지금 아기의 발달은 정상인 것일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와중에, 너무 많은 정보 탓에 골치가 아프다. 매일같이 인터넷 검색창을 두드리는 예비 엄마들과 초보 양육자들은 정보의 바다에서 꼬르륵 가라앉을 지경이다.
그 와중에 소셜 미디어는 완벽하게 날씬한 몸매의 미녀 임산부, 매일같이 환상적인 아기 식단을 꾸리는 엄마, 먼지 하나 없이 정돈된 살림살이를 뽐내는 워킹맘처럼 도저히 달성 불가능할 것 같은 이미지들을 무차별적으로 뿌려댄다. 이제 정보의 바다는 깊고 넓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뿌리 세계를 더욱 말라붙게 만드는 독우물이 된다.
출산 준비물 정보인 척하는 광고, 아기 발달 영상인 척하는 광고, 유명세를 얻으면 슬그머니 얼토당토 않은 제품을 팔아대는 인스타그램 계정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동일하다. ‘이것’만 있으면, 당신은 영원히 뿌리 세계의 불확실성에 발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환상적인 약속이다. 이것만 있으면 아기가 통잠을 잔다. 이것만 먹이면 아기 키가 큰다. 이것만 사면 아기가 한글을 뗀다. 만약 이걸 안 하면? 아이고, 큰일 난다! 소비 중심의 미디어 세계는 햇빛 세계의 논리를 뿌리 세계에 투영한다. A를 하면, B가 이루어진다는 인과적 통제 가능성을 달콤하게 속삭인다.
다른 마케팅도 그렇듯이, 재생산 세계를 둘러싼 소비 문화도 불안을 조장한다. 공포스러운 것만큼 눈길을 잡아 끄는 것은 없다. 문제는 산모와 아기를 둘러싼 특수한 취약성이다. 아기 양육자에게 세상은 아기를 향한 위협이 만연하게 느껴지며, 미약한 아기를 지켜내야 한다는 보호 본능이 절대적이다. 긍정적이고 편안한 이야기보다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이야기가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불안을 먹고사는 미디어의 범람 시대에는, 아기 엄마들이 귀한 시간을 미디어에 내어주고 그 대가로 스트레스를 적립한다. 불안 조장형 콘텐츠는 뭔가가 위험하고, 금기이고, 때로는 그 반대로 절대적인 필수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정작 그 실체에 대해서는 제목이나 요약으로 명료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게시물 제목은 전형적으로 핵심 키워드를 빼놓은 낚시형 포맷을 하고 있다. 내용은 경고 혹은 의무의 과잉이다. 그 내용이 완전히 사리에 어긋난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사실이긴 하나 과장되었으며, 때로는 진실과 선동을 교묘하게 섞어 놓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조장된 불안을, 바로 그들이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매혹한다. 마지막으로 그 해결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입하게 만든다. 일련의 과정에서 뿌리 세계는 최소한 세 번 타격을 받는다. 불분명하고 불확실할 수밖에 없는 뿌리 세계 특유의 특성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낙인찍는 것에서 한 번. 그 뿌리 세계의 속성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가짜 믿음을 심어주는 것에서 두 번. 마지막으로 양육자들의 자원을 착취하여 재생산을 더 값비싼 일로 만드는 것에서 세 번! 끝없는 주목과 소비를 종용하는 문화는 이렇게 뿌리 세계를 고사시킨다.
햇빛 세계의 법칙으로 점철된 뿌리 세계는 더는 견딜 만한 곳이 아니다. 금기가 너무 많아진 나머지, 아이에게 맘 편히 해 줄 수 있는 것이 줄었다. 의무가 너무 많아지자,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지 않다. 혹시 아이의 작은 신호 하나하나가 비정상에 대한 경고일까 봐 애랑 웃고 즐길 수가 없다. 부모를 저격하는 유해한 미디어는 불안을 조장하고, 불안을 먹고 산다. 그래야 더 많은 클릭과, 좋아요와, 하트를 받는다. 이들은 새로운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에 잔뜩 긴장하고 예민해진 마음을 빨아먹고 성장한다. 불안이 더 커지면, 그들은 더 성행한다. 그래서 소셜 미디어도 자꾸만 불안 조장형 콘텐츠를 이용자들에게 들이민다. '이것 좀 봐, 무섭지? 걱정되지? 안 보고 배길 수 있겠어?'
의외로, 불안은 정상적인 반응이라 적당할 때에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 우리는 적당을 모르고 끝장에 능통한 한국인이다. 더 과격한 경쟁으로 이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 더 많은 소비를 통해 불확실성을 일소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문제를 종결하고 미래를 예측, 통제한다는 달콤한 감각을 얻을 수 있다. 이제 투입되는 자원은 한도 끝도 없이 치솟는다. 대체 언제까지? 그 자원을 기꺼이 지불하는 자가 ‘호구’로 보일 지경이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