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적당하면 충분하다
하도 긴 글을 풀어내다 보니 정체성이 희미해진 것 같은데, 나는 산부인과 의사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종양 수술 이야기를 하겠다. 난소암 종양 축소술에는 옵티멀(최적) 개념이 있다. 수술 후에 남은 종양이 최대한 없어야 수술 목표인 옵티멀을 달성한 것이다. 그 목표를 (여러 이유로) 달성할 수 없을 때, 수술은 서브옵티멀(준최적)로 정의된다. 물론 이것은 의사가 치료 과정을 객관화하기 위한 지표로 등장한 용어이다. 당연히 수술은 완벽에 가까울수록 좋다. 단, 옵티멀은 위탁과 계약으로 완성되는 전문가 관점의 지향점이다. 그마저도 인간의 불완전함과 취약성으로 때로는 달성이 불가능하다. (모든 종양을 떼어내고 시체가 남는다면, 그 수술이 옵티멀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의료는 뿌리 세계와 햇빛 세계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는 대표적인 분야이다. 뿌리 세계에서 자라난 인체를 대상으로 하되, 확실하고 완전한 결과와 원칙을 중시하는 의학이란 영역에서도 엄연히 최적이 아닌 것, 서브옵티멀이 차지하는 자리가 있다. 하물며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은 어떨까?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은 어떨까? 인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최적이나 완벽은 오히려 엉뚱한 목표이다. 햇빛 세계를 추종하는 인간의 인지적 편향이 부추기는 환상이다.
우리의 본성에 대한 메타적 인지는 문제 해결의 핵심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은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경향성이 있다. 이것은 양분 획득이 용이하도록 만드는 진화적 압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수렵 채집 사회에서 달콤하고 기름진 것은 흔하지 않으니, 최대한 확보해서 저장해야 한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현대 사회에서 당분이 많은 음식, 고칼로리 음식은 저렴하고 흔해졌다. 하지만 본능적 취향은 변하지 않아서 굶주린 원시인 시절처럼 여전히 달콤하고 기름진 음식이 못 견디게 맛있다. 이 간극에는 당연히 부작용이 따른다. 비만과 성인병을 비롯한 각종 만성질환이 그것이다.
이제 인간은 우리의 입맛을 되돌아 볼 수 있을 만큼 진보했다. 그래서 건강을 챙기는 차원에서 지나치게 느끼한 음식, 설탕이 과한 음식을 자제하기도 한다. 바삭한 치킨이 맛있기는 해도, 삼시세끼 치킨만 먹지는 않는 것이다. 문화적 영향도 있다. 한식은 외국 음식보다 상대적으로 담백하다. 그러니 한식이 익숙한 한국 사람에게 느끼한 양식은 그리 먹음직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달고 기름진 것을 좋아한다는 보편 원리는 그대로이지만, 인식과 시대, 문화에 따라 적절한 수준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같은 논리를 사회 전반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달콤한 것이 좋긴 해도, 무한히 그것만을 요구할 수는 없다. 안전하고, 확실하며, 관계나 육체에 얽매이지 않는 개인의 성(城)이 안락하기는 해도, 그런 방식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 뿌리에서 기인하는 불확실성, 위험, 통제되지 않는 요소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재검토할 시점이 되었다. 저출산뿐만 아니라 의료와 교육처럼 인간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산업군이 동류의 위기를 맞고 있다. 모두가 햇빛만을 욕망하는 가운데 우리의 기원인 뿌리만큼은 땅 속에 박혀있다. 인간이 태어나는 곳은 얼마간 위험하고 약간씩은 서로를 침범하며 때때로 불확실한 것들이 공존하는 세계이다.
위니코트는 모든 엄마는 충분히 좋은 엄마가 될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중략) 또한 위니코트의 ’충분하다‘는 의미는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니코트는 완벽한 엄마는 불가능할뿐더러 오히려 아이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중략) 위니코트가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완벽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충분히 좋은 엄마』- 옮긴이 서문 중에서
유감스럽게도 우리 시대의 출산율은 이미 정해졌다. 하지만 다음 세대는 어떨까? 최적화 논리에 매몰된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성년이 되어서 갑자기 뿌리 세계에 진입할 수 있을까? 그들의 임신과 출산, 양육이란 경험은 나의 세대보다 정신적 진입 장벽이 더 높지 않을까? 확실한 안전, 보장되는 미래, 완벽한 통제를 추종하며 키운 아이가 훗날 성장하여 복잡한 인간관계,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 생로병사의 불확실성을 견딜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아이들은 건전한 느슨함 가운데에서 더 여유롭고 덜 불안하게 자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세계관의 균형을 맞추어 나갈 때 가장 이득을 많이 보는 자들은 어린이들이다.
햇빛 세계가 뿌리 세계를 전방위적으로 망가뜨리고 있다. 재생산 전반에 걸쳐 옵티멀이 아닌 서브옵티멀을 적극적으로 지향해야 한다. 불완전한 것은 실패가 아니다. 뿌리 세계로 향하는 것은 추락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