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즈 존? 웰컴 키즈 존?
저출산 대책은 출산 가정에 일방적으로 금전, 자원 등을 베풀어주는 것이 주류이다. 이를테면 나는 임신하며 의료비 지원을 받았고, 아기를 낳고 나서는 양육 수당을 받았다. 육아 휴직 사용이 차츰 확대되고 있으며, 신생아 대출이나 신혼부부 청약도 있다. 그런데 내 이야기의 결론에 다다르면, 유감스럽게도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보통 뿌리와 잎새의 균형은 자연스럽게 갖춰지게 마련이다. 뿌리가 물을 빨아들이지 못하면, 잎새도 싹을 틔우지 못한다. 잎새가 햇빛을 충분히 끌어와야, 뿌리도 더 튼튼하게 자랄 수 있다. 뿌리와 잎새가 개성이 다르다는 것 자체는 사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여러 불균형 요인은 이미 뿌리를 고사시킬 만큼 극단화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경쟁에 몰입한 우리의 정신머리는 가성비, 고효율, 최적화에 너무나도 절여져서 좀처럼 양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술 문명의 발달, 소비 중심의 문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등등 명시적 원인은 많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유독 걱정스러운 불균형의 원인은, 저출산 그 자체이다.
출산율은 출산율과 양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몇 가지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일단 아이들이 충분히 존재하는 사회에 보육 시설, 놀이 시설과 같은 아이들을 위한 인프라와 제도가 존재할 수 있다. 또한, 남도 애를 낳아야 나도 눈치를 보지 않고 애를 낳는다. 사회적 압력은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다. 다들 아이를 많이 낳는 분위기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산을 별다른 저항 없이 선택할 것이다. 즉, 재생산에 우호적인 문화에서는 이미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을 것이며, 그들은 후속 출산율의 선행 지표로 작용한다.
어린 아이들은 그 자체로 약간의 혼란과 적당한 소동을 일으킨다. 이를테면, 대체로 다둥이 가정은 자연스럽게 통제와 규율이 무뎌지게 된다. 어른이 쫓아다니면서 일일이 간섭하고 사사건건 챙기는 것도 애가 하나일 때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이 유발하는 불확실성과 관계성, 그들의 내재적인 속성인 취약함과 무논리는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정신 세계를 뿌리 쪽으로 끌어당기는 효과가 있다. 단, 그들이 일상적으로 탐지될 만큼 충분히 많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용한 통계 자료가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83년생, 88년생의 인구동태 코호트 분석이다. 88년생인 만 35세 여성의 59.5%만이 결혼을 했고, 결혼을 한 사람 중 76.9%는 자녀가 있다. 물론 혼인율과 출산율은 과거보다 크게 떨어졌다. 우리 나라에서 혼외 출산은 비중이 지극히 적으므로 이를 무시하고 계산한다면, 내 나이 여성 중 임신-출산-육아를 경험한 사람의 비율은 고작 45.8%이다. 채 절반이 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동년배 남성은 기혼율이 더 낮으므로, 더 적은 사람만이 자녀를 가진 삶을 살고 있다. 많은 여성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있으며, 결혼을 했어도 아기를 낳지 않았다. 이제 재생산이란 것은 상대적으로 희귀한 경험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는 이미 아이들이 너무 적다. 그러니 자녀를 키우는 어른도 너무 적다. 뿌리 세계가 우리의 시야에서 한참 벗어나버렸다. 어른은 성숙하기 때문에 대체로 매너를 잘 지키지만, 아이들은 태생적으로 그러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 아이가 희소하기 때문에 모든 이가 모든 이에게 높은 수준의 규율, 상호 감시를 기대하게 되었다. 결국 어린이의 존재는 허락을 구해야 가능한 일이 되었다. 마른 수건에서 최소한의 유연함, 약간의 비효율을 꽉 비틀어 쥐어짠 덕에 다같이 행복해지기라도 했을까? 아닌 것 같다. 나는 사회가 최적의 예측도와 통제성, 개인성을 일상적인 차원에서까지 과도하게 요구하게 된 것에는 이 효과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작용했으리라고 믿는다.
이제 뿌리는 말라 비틀어지고, 햇빛 추종자들만 만연하다. 잎새는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기 위해 각도를 비틀어보고, 면적을 최대한 넓히고, 가지를 높이 뻗는다. 그렇게 일조량 확보를 위해 꾀를 짜내며 분투하던 잎새가 어느 날 결심을 한다. 저 뿌리. 축축한 땅 속에 쳐박힌 뿌리 때문에 더 높이 갈 수가 없어. 비천한 뿌리만 없다면, 따사로운 햇님한테 닿을 텐데. 그렇게 스스로 줄기를 베어서 추락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다. 사실은 자신이 나무의 일부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