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도 나 사랑하기 연습은 현재 진행 중
2차 성징과 함께 찾아오는 10대 시절의 사춘기. 그 무렵의 나는 또래 친구들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한 템포 느린 아이였다.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는 경계가 뚜렷해지고 자아가 더욱 강하게 형성되는 시기. 자신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열렬히 스스로를 탐구해야 마땅한 그 시기. 특히나 각자가 부여받은 성. ‘여성’으로서의 특징이 분명 해지는 그 시기에 나는 민둥 했던 가슴이 봉긋해지고 등허리를 타고 흐르는 매끄러운 굴곡이 영 어색했었고 그런 여성스러움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 건 그때부터였을까. 여성이므로, 여자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내 것이 아닌 냥 외면하며 스스로를 부정하는 감각을 내 몸속 깊숙한 어딘가에 각인시켜 버린 것 같았다. 재미있는 건 나를 부정하는 동시에 타고난 것에 반反하고 경계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기로 결정한 내 모습이 어쩐지 멋있어 보였다는 것이다. 어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치기 어린 마음을 간직한 채 그렇게 나는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여성스러움이라는 틀에서 이탈한 10대 시절을 보냈다. 완연한 여성으로 살아가지 않겠다는 내 인생의 결정권자로 살아가고 있다 믿으며 세련되게 스스로를 속였다.
치마 아닌 바지, 긴 머리 아닌 짧은 머리, 색조를 허락하지 않는 민낯 그대로의 얼굴. 친구들이 화장을 하기 시작하고 몸 선이 드러나는 예쁜 옷을 입고 곱게 치장하는 것을 지켜보며 내가 추구하는 멋은 다르다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이런 순간을 마주 할 때마다 마음 한편이 가시에 찔린 것처럼 불편했다. 사실은 그들이 부러웠기때문다. 정확히 표현하면, 나는 그들의 아름다움이 아닌 ‘스스로를 당당히 드러내고 가꾸는’ 그 모습 자체가 부러웠었다. 적어도 내 눈에 비친 그들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그 모습이 부러웠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빠진 시력으로 인해 끼게 된 멋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테안경. 식성이 좋았던 탓에 살이 올라 통통했던 몸. 내성적인 나를 괴롭히기라도 할 셈인지 짓궂은 호르몬의 농간으로 여드름이 올라와 불긋불긋 울퉁불퉁했던 피부. 한창 예민하던 그 시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나는 도무지 정을 붙이기 어려웠다. 신체는 ‘여성’으로 변해가고 내 자아는 남들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여성이라는 껍데기를 부정하려던 것이 아닌 여성으로서 아름답고 매력적이지 못했던 내가 싫었던 것뿐이면서. 그렇게 나는 ‘그런 건 나답지 않아.’라는 말 뒤에 숨어버렸다.
그렇게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에 솔직하지 못하고 숨어 지내다 보니 나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순간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런 나를 누가 좋아하겠어.’,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와 같이 나를 좀먹는 생각에 지배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학생 시절에는 누가 나를 쳐다보는 것도 싫고 사람들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에 진로 고민을 핑계로 휴학까지 할 정도였으니 참 심각했었던 것 같다. 마음은 병들어 있었지만 겉으로는 나름 멀쩡해 보였기에 일상생활을 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그때그때 요동치는 마음을 다잡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나를 사랑하는 일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을 돌보고 아껴주는 걸까.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방법을 알아내고 싶다 생각한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아름다움에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살이라도 빼야 할 것 같았다. 어쩌다 다이어트에 성공하기라도 하면 내가 조금 이뻐 보이고 좋았다가 요요로 다시 살이 쪄버리면 내가 싫어지기 일쑤였다. 반복되는 실패는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고 다시 내가 싫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다. 그러다 이 지긋지긋한 다이어트라도 제대로 해보자 싶어 악착같이 노력한 결과 20킬로를 감량하게 되었다. 그때의 내 나이가 28살이었다.
이 다이어트 경험 이전과 이후로 내 삶이 구분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삶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날씬하고 가벼워진 몸 덕에 자신감이 생겼고 드디어 입고 싶었던 옷들을 마음껏 입어볼 수 있었다. 내가 항상 원하고 상상해오던 대로 나를 꾸며보고 또 마땅히 그럴 수 있는 신체조건이 받쳐주는 경험은 나를 극도로 고양시켰다. 더 놀라운 건 여태까지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했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과 그 욕망을 실현시켰을 때의 나 스스로에 대한 태도였다. 28년 인생 처음으로 나를 제대로 사랑하는 일에 대한 감각을 깨우치게 된 것이다.
늘 스스로를 엄격하게 대하고, 비판하고, 부끄럽게 여겼던 사감 같았던 내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관대해졌고, 내 모습에 크게 만족했으며, 나를 사랑해주었다. 정말 말 그대로 나와 사랑에 빠졌었다. 이런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나를 귀히 여기는 마음은 나를 어디서나 당당하게 행동하게끔 만들었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사랑스러운 여주인공,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자신을 가꾸는 유명인사들, 주변의 자신감 넘치는 친구들의 모습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가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이 스스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마법 같은 일이었다.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충족되자 그제야 내가 가진 다른 자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가진 다양한 재능, 따뜻한 성격, 끈기, 센스 있는 감각 등. 나는 굉장히 멋있고 근사한 사람이었는데 그동안 나는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다 못해 평가절하 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나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후, 나는 다시 20킬로가 쪘다. 다이어터의 삶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살을 빼기 전과 같은 몸무게인데도 내 마음은 그때와 같지 않다. 같은 몸 다른 정신. 지금의 나는 좀 더 단단하고 강해졌다. 그래서 가끔 내가 싫고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순간이 와도, 설령 정말 동굴 속으로 숨는다 할지라도, 그 어둠 속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동굴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하고 내밀 것을 안다. 이내 다시 빛을 찾아 나설 것을 안다. 이제 나는 어린 날의 나 보다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고 어떻게 격려해줄지를 아는 어른이 되었다. 그 사실을 돌이켜보는 지금 이 순간도 약간은 마음이 벅차고 스스로가 대견하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현재 보다 더 나은 상태가 되길 바라며 살아간다. 무엇이 더 나은 것이냐에 대한 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 욕망이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는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래서 실패라는 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행동을 해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수정하고, 다시 시도하고를 반복하며 더 나은 나를 조각해나가겠지. 우리가 죽어 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