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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Mar 24. 2024

"네 부모님의 미소는 진짜 멋져!!"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15

 2022년 5월 24일

 걷기 11일 차: 산토도밍고 데 라 칼자다 -> 비야마요르 델 리오 -> 비야프란카 몬데스 데 오카

 오늘은 시작부터 컨디션이 좋았다. 가볍게 아침을 먹고 길을 출발했다. 구름이 많이 낀 날씨. 한국에서는 이렇게 구름이 낀 날이면 기분이 조금 우중충해지는 편인데 이곳에서는 걷기에 딱 좋은 날이라 반갑기까지 하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그라뇽 마을을 지나간다. 예전 기억이 아주 좋았던 곳이고 이곳에서부터 멀지 않으니 그곳에서 아침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구름 속에서 마치 노을과도 같은 일출이 보인다.>
<그라뇽 마을 입구에 그려진 벽화>

 다리에 근육이 붙어서일까? 6.5km 떨어진 그라뇽까지 90분 만에 왔다. 이제 부모님도 이 정도는 가뿐할 정도로 순례자 생활에 적응이 됐다는 증거일 것이다. 마을 입구, 예전엔 보지 못했던 귀여운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계단을 오르자마자 바도 생겼다. 여기에서 쉬는 순례자들이 많이 있다. 역시 순례길 위 바도 위치가 중요하다. 대부분 마을 초입 첫 번째 보이는 바가 장사가 제일 잘된다. 우리는 그냥 지나치고 성당 앞에 있는 바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맙소사! 오늘 성당도 문을 안 열고 바도 문을 안 열었다. 이곳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었는데. 길을 잘못 들지 않은 이상, 순례자는 되돌아가지 않는 법. 성당 앞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간식을 먹었다. 

<그라뇽의 산 후안 바우티스타 성당, 조용한 아침 거리>

 그라뇽 마을을 빠져나갈 무렵, 포토존이 나왔다. 예전에도 이런 길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길이 보였다. 아빠는 오늘도 역시 연신 카메라를 누르기 바빴다. 

<그라뇽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
<로스 아르코스에서 만난 레나가 찍어준 사진>

 길을 걷다 보니 앞서서 걷는 익숙한 하늘색 배낭이 보인다. 영국에서 온 데비이다. 

<익숙한 실루엣의 그녀>

 용서의 언덕을 넘는 무더운 날, 뜨거운 태양을 가리는 작고 귀여운 우산을 쓴 데비를 만났다. 우리가 먼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었고 조금 있다가 그녀가 올라왔다. 용서의 언덕을 넘을 때는 그늘을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늘에서 쉬던 순례자들은 지금 막 올라오는 순례자에게 양보를 한다. 우리도 그렇게 자리를 양보받았고 이젠 데비에게 그늘 자리를 양보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위에 지친 그녀는 힘이 들어 보였고 엄마는 홍삼 사탕을 전해주었다. 그때부터 길 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는 날이 많았다. 엄마와 그녀는 하루나 이틀 서로가 안 보이다 다시 만나면 무척 반가워하는 사이가 됐다. 그녀는 더위에만 약하지 기본적으로 체력이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늘 우리보다 뒤에서 나타났다가 앞장서서 걷는다. 

<초록초록한 밀밭을 많이 본 날>

 산토도밍고 성인이 태어난 곳이라는 빌로리아 데 리오하에 도착했다. 예전에 이곳에서 만난 마을분과 한국의 자살률은 왜 높은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떠올랐다. 성인의 집터와 마을회관? 박물관?으로 보이는 곳이 있었다. 

  이곳까지 약 14.5km를 걸었다. 엄마 컨디션도 슬슬 안 좋아지는 것 같아 택시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마을이 너무 작아서인지 바가 없었다. 갖고 다니는 지도 책에 버스가 서는 마을이라고 나와있지만 지난 나바레떼에서의 기억이 좋지 않아 버스는 피하고 싶었다. 벤치에 앉아 쉬던 엄마는 다음 마을까지 천천히 걸어가 보자고 하셨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에 보이는 초록초록한 밀밭들이 정말 예뻤다. 더 걷기로 해서 다행이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놓칠 수 없지란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좋아했던 참치 샐러드>

무사히 다음 마을인 비야마요르 델 리오까지 18km를 6시간 만에 걸었다. 순례길에서 조금 벗어난 바를 찾아 간단히 점심을 먹으며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드렸다. 바 주인아주머니는 어디까지 갈 것인지를 묻고 여기 앞에서 버스가 서니까 조금 기다렸다가 가라고 얘기했다.  

 '흠, 버스 정류장이 안 보이는데 진짜 오는 건가?' 나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지난번 일도 있으니 그냥 택시를 불러달라고 말하니 이 마을엔 택시가 없어서 벨로라도에서 와야 하니 식사를 하며 조금 기다리라고 말했다. 샐러드 두 접시와 샌드위치 두 개를 샀는데 아빠가 이 집 참치 샐러드가 정말 맛있다며 좋아하셨다. 

 식사를 하고 있으니 정말 바 앞 도로에 버스가 섰다. 순례자 두 명이 버스를 탔다. 역시 현지 마을분 말이라 틀리지 않은 정보였다. 다음엔 버스에도 한 번 도전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 멀리 독일 부부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요 며칠 길에서 보지 못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잘 걷고 있는 걸 보니 다행이라며 엄마와 아빠를 보고 환한 미소를 보여준다. 단 하룻밤 같은 숙소에 머물렀을 뿐인데 길 위에서 만나면 이렇게 반갑다니... 순례길 위 인연은 참 묘하다. 

 잠시 후 택시를 도착했다. 오늘은 비야프란카 몬데스 데 오카라는 마을까지 간다. 내일 기울기가 꽤 가파른 산을 올라가야 하기도 하고 아헤스로 내려가는 내가 좋아하는 길이 나오기 때문이다. 


 숙소에 도착해서 씻고 동네 슈퍼가 가서 마실 것도 샀다. 그리고 숙소에 있는 바에 내려갔더니 용서의 언덕에서 만났던 미국인 부부가 앉아 있었다. 그들 역시 부모님을 보고 정말 반가워하며 합석을 하자며 큰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이 부부는 용서의 언덕 꼭대기에서 만났는데 아빠 모자에 달려있던 태극기 배지를 궁금해했다. 아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질 때 아빠는 그들에게 태극기 배지를 선물했다. 그 이후로 길에서는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었는데 이곳에서 만나다니 반가운 인연이다. 내가 통역사가 되어 한 시간 가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순례길에 올 때마다 영어나 스페인어를 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사실 해외 관광지에 가면 짧은 영어로나마 여행할 수 있어 불편하지 않다. 이곳에서는 관광지와는 다르게 만나는 사람들과 좀 더 진지하고 서로의 생각에 관한 대화를 많이 하게 되는 편이라 언어의 아쉬움이 크다. 

 중학교 영어 실력으로나마 외국인과 대화를 무리 없이 하는 날 보며 부모님은 비싼 돈 주고 공부시킨 보람을 느끼시지 않았을까?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의 산티아고 성당>
<숙소에서 바라본 풍경>

오늘은 반가운 사람들은 많이 만났다. 하룻밤 숙소를 함께 썼을 뿐인데 길 위에서 잠시 같이 앉아 쉬었을 뿐인데 서로를 걱정하고 안부를 묻고 다시 만나면 반가워한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순례길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 보니 우리 부모님, 여기에서 나보다 외국인 친구들 많이 사귀셨네. 부모님은 영어를 거의 못하셔서 이들과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순 없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 말한다. 

 "네 부모님의 환한 미소는 진짜 멋져!!"

 그렇다. 한마디 말보다 더 나은 환한 미소, 그 미소가 이 외국인들을 사로잡은 우리 부모님만의 매력이 아닐까?



*숙소 정보: HOTEL SAN ANTON ABAD

 3인실이 없어 방을 두 개 예약했다. 조식이 포함된 가격이라 비싸게 느껴지진 않았다. 건물 자체가 오래되긴 했지만 하루 푹 쉬기에 좋고 로비를 잘 꾸며놓아서 볼거리가 많다. 호텔과 함께 알베르게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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