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도 길었던 이혼 협의 기간과 숙려기간이 끝나가던 차, 남편이 나에게 다시 해보고 싶다고 말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던 그 순간, '이혼 위기'라는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을 받아들이고, 극복해 내려고 또 다른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던 '그 처음 순간'으로 되돌아갔다.
"생리 기간에도 핑계 대지 말고, 어떻게든 감정기복 부리지 마."
남편의 이 말에 나는 정신건강의학과를 향했다. (나는 가스라이팅 같은거 잘 안당하는 편이라고 여겼는데, 남편은 항상 내가 문제라고 해댄 덕에 내가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주입된 것 같았다.) 정신건강의학과는 증상을 이야기하고 약만 처방받는, 2분 정도면 진료가 끝나는 병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첫 방문이어서 그런지 의사는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해, 왜 병원을 찾게 됐는지, 어떤 증상이 있는지, 무엇이 원인인지 등 꼼꼼하게 물었다. 그러더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등도 물었다. '의사가 이런 것도 물어보나?' 싶긴 했다.
"약은 아주 소량만 처방을 해드릴게요. 그리고 다음번에 오실 때는 약을 계속 복용하고 싶으신지 생각해 보세요. 제가 보기엔 약물치료가 꼭 필요하진 않은 것 같아요. 다만, 본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소량만 드셔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선택권을 나에게 주었다. 보통 내과, 정형외과, 치과, 한의원 등 병원에 가면 의사가 진단을 해보고, 의사의 소견대로 약을 처방해 주는 일이 전부였다. 나는 약을 복용하기로 했다. 월경 중에 남편이 느낀다고 하는 감정기복이라는 걸, 내 의지대로, 내 노력대로도 안된다고 하니 방법이 없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남편 뜻대로 해주자'의 마음뿐이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마음이 그것 밖에는 없었다.
의사는 이어서 이런 말을 했다.
"이혼도 생각해 보세요. 행복하려고 결혼한 거잖아요. 아직 젊고 충분히 잘 살 수 있잖아요. 그런데 만약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제가 아는 상담 가능한 병원을 추천해 드릴 테니 그곳에 문의해 보세요."
솔직히 충격이었다. 그것도 매우.
'이런 말은 내 여동생이 용기 북돋아 준다고 해줄 법한 말인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여동생은 이혼 결정이 난 후, '언니 아직 창창하잖아. 얼마든지 새로운 연애 하면 되~ 걱정 마~'라며 웃자고 이런 소릴 했었다.
내가 만났던 의사나 심리상담가는 중립적이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은, '내담자가 스스로 답을 찾고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내담자가 스스로에 대해 몰랐던 모습도 찾아보고, 어린 시절의 상처나 결핍도 들여다보고요. 문제해결을 할 수 있도록 같이 방법도 찾아볼 거고요'와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절대 나에게 답을 준 적이 없다. 답을 준 적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상담 중 나에게 공감을 하며 위로를 해주기도 하였지만, 단어 그대로 공감이었을 뿐이고, 어떤 때는 매우 정확하게 중립적이어서 오히려 냉정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 의사의 말이 나의 이혼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다. '의사가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그 말을 듣고도 당시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으니 말이다.
남편이 선택하고 예약한 상담센터에서 부부상담을 받다가, 남편의 부부상담 중단 통보 이후 남은 회기를 개인상담으로 받았다. 상담사는 이런 말을 했다.
"사실... 이혼하기로 결정됐다고 하니 하는 이야기인데요, 남편은 결혼 상대로서는 정말 힘든 사람이에요. 저도 가정법원에서 일을 했었기 때문에, 이혼 신청하러 오는 부부들에게 무조건 부부상담을 받아보라고 해요. 숙려기간에 부부상담을 받고 관계가 회복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 남편 분은 결혼생활을 유지하기에는 많이 힘든 사람이에요. 잘하셨고,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이런 말을 연이어 듣게 되자 마음이 이상했다. '이상하다' 말고는 표현할 도리가 없다.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낯선 감정이라, 표현하기엔 말문이 트이질 않는다. '그래, 나 그동안 고생한 것 맞구나. 나 쉽게 포기하는 거 아니고 최선을 다한 것 맞구나. 우리, 힘든 결혼생활을 한 거였구나'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영화 해리포터에서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뽑아 담은 폴리주스를 마시면, 여러 재료를 섞은 주스 덕에 역해서 속이 울렁거리다가 다른 사람의 외형으로 변하곤 하는데, 그 영화 장면이 떠올랐다. 속이 울렁거리고 좋지 않았다.
부부상담을 받기 위해 나와 남편은 다양한 검사를 했고, 검사는 기질 및 성격 형성과 더불어, 히스테리 정도, 반사회성, 강박증 등의 척도 관련된 것들이었다. 나는 나에 대한 의심이 높은 상태였다. 남편에 따르면, 남편이 화가 나는 원인은 모두 '나'였기 때문에, 남편을 탓해보기도 했지만 내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스스로를 탓했던 순간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사 결과를 듣기 전, '나는 감정기복이 많은 사람이고, 우울도도 높은 사람이고, 이래저래 불안한 내 상태들이 결과지에 나와있겠구나' 생각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결과가 건강하게 나왔어요. 대부분 정상 범위 내에 있고, 기질적인 몇 가지 특징이 있지만 성격 형성이 잘 되어 있어요.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노력도 하는 편이고요. 힘든 일을 겪을 때도 스스로 잘 극복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가졌어요."
"정말요...?"
"네, 정말이요. 우울도가 약간 있긴 하지만, 지금처럼 힘든 상황을 겪으면서 오히려 우울도가 아예 없는 것도 이상할 수 있어요. 다만 정상범위를 벗어난 또 다른 하나는 '너무 잘 참는다'는 거에요."
상담사는 개인정보라서 남편의 정보를 공유해 줄 수는 없다고 했지만,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서 남편에 관한 몇 가지 대화가 오고 갔다.
'우리의 이혼이, 잘 선택한 것이라...'
오히려 이런 말을 여러 번 듣다 보니, 내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르긴 했다. 처음에는 그들도 사람이니,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해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충분히 고민하고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주제였다.
그리고 나의 결론은, '당시의' 남편과 나에게, 이혼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남편의 다시 해보고 싶다는 말에, 우리 이혼의 시작지점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