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켁, 공감의 통역사

내 근무지는 집

by 진주

​나는 방문간호사다. 내 근무지는 천장이 높은 병원 건물이 아니라, 어르신들의 '집'이다. 매일 수첩에 적힌 주소를 따라 문턱을 넘는다. 그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나는 잠시 간호사이자 딸이 되며, 때로는 낯선 길을 묻는 여행자가 된다.

​병원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밖에서 만나는 삶의 풍경은 투박하고 솔직하며, 가끔은 너무나 외롭다. 그곳에서는 효율과 속도보다 서사(敍事)와 경청이 우선시 된다.

​병원의 풍경: '효율'과 '단절'의 충돌

​며칠 전, 잠시 정기적으로 들른 그 거대한 시스템의 입구, 즉 병원 카운터에서 마주친 풍경이 내 머릿속에 하나의 강렬한 장면으로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병원 카운터 앞. 허리는 굽었을지언정 몸가짐이 반듯하고 기가 살아있는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할머니는 젊은 간호사를 상대로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리켁, 지리켁이 떨어졌어요."

​간호사의 대답은 간결했고, 냉정했다. "없어요, 없어요. 그런 약은 저희 약 목록에 없어요."

​할머니는 당황했지만, 그 반듯한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오히려 더 또렷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내가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내 기록 좀 찾아보세요."

​"없어요. 그런 약 없어요." 누가 들어도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몇 년 동안 이 병원에서 타 먹었어요, 컴퓨터에 찾아보세요" 할머니는 의사의 진찰을 위해 애걸에 가까웠다. 간호사는 한 참만에 "지리켁'은 없고, '지르텍'은 있어요."

​"맞아요! 그 약입니다!" 단순한 발음 오류였다. 노화로 인한 언어 능력의 미묘한 퇴색, 혹은 수십 년 전부터 혀에 익숙해진 발음이 만들어낸 작은 실수. 그 순간 간호사는 자신의 효율적인 지식이 승리했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강직한 삶의 화살: 존엄을 위한 질책

​하지만 할머니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굴복하지 않는 기개와 준엄한 기운이 실려 있었다.

​"할머니가 발음이 이상하면 찾아보고 친절하게 설명해야지, 없다는 말만 해요? 너 배웠다고 거기 앉아있냐? 배웠으면 모르는 것을 찾아서 제대로 설명해 줘야 똑똑한 거지."

​할머니의 질책은 약 이름의 오류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반듯하게 살아온 한 생애'가 '흐트러진 태도'에 던지는 일침이었다. 젊은 간호사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받았다고 느꼈는지, 얼굴을 붉히며 맞섰다.

​"할머니가 잘 못했잖아요?"

​"뭐야, 증거가 기록지에 있는데 컴퓨터로 찾아야지 퉁퉁거리면서 없다고 큰 소리만 치면 다냐? 내가 못 생겼다고 무시하는 거야? 내가 무식하다고 내 자식도 무식한 줄 아냐? 내 딸 너보다 똑똑해."

​할머니는 그저 '지리켁'을 잊은 나약한 노인이 아니었다. 당신의 말은 굽은 허리에도 불구하고 꼿꼿하게 서서, 노년을 무시하고 불친절을 일삼는 태도를 향해 쏘아 올린 강직한 삶의 화살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한 편의 통렬한 교육 현장을 목격했다.

그다음, 진료를 의해 병원을 방문했다. 그 간호사는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그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평소 친절하지도 않았고 굳은 얼굴은 병웜의 차가움을 강화시켰다

공감의 통역사: 불완전한 퍼즐 맞추기

​나는 매일 어르신들의 '집'이라는 시스템 안으로 들어간다. 병원이 효율과 속도를 우선시하는 곳이라면, 어르신의 집은 삶의 서사와 애환, 그리고 불완전한 기억이 뒤섞인 세계다.

​내가 어르신 댁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잊힌 이름, 기억의 망각을 잡으려는 작은 노력이다.

​"이거… 그 뭐시냐…",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방문간호사는 어르신의 방대한 삶의 기록을 더듬어, 그 불완전한 퍼즐 조각들을 맞춘다. 일반인에게 ​'지리켁'은 알파벳의 오타로 의사소통의 부재였다. 몸이 반듯한 그 할머니에게는 자신의 불편함이 해소되기를 바라는 한가닥이 간절한 요구요 기억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젊은 세대에게 이해받고 싶은 노년의 존엄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오늘 하루도 어르신들의 흐릿한 말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공감의 통역사'였음에 감사한다. 어르신의 심신의 상황, 욕구에 집중한다면 어색한 문장이나 의미 없는 단어의 나열 속에 어르신의 필요가 보인다. 아이의 옹아리를 엄마는 알아듣는 것처럼. 관심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노년의 풍경은 낯설고, 때로는 서툴지만, 그 길을 걷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간호는 경청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들에게는 효율적인 병원 시스템보다, 자신들의 서툰 발음마저 따뜻하게 받아줄 한 사람의 반듯한 마음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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