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과 안전 사이에서
자신을 꾸미고 가꾸는 일은 인간의 자존감을 가장 빠르고 쉽게 표현하는 방식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곧 내면의 단단한 자의식을 대변한다. 그러나 이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 때로는 생명과 안전이라는 치명적인 대가를 요구한다는 아이러니는, 우리가 개성과 안전 사이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마주하는 질문이다.
역사 속 위인들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위험한 선택을 주저하지 않았다. 현대 무용의 선구자인 이사도라 던칸은 그녀의 상징과도 같던 길고 화려한 스카프를 늘 목에 둘렀다. 그 스카프는 그녀의 패션 아이콘이자 자유로운 영혼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결국 차량 바퀴에 감기면서 그녀의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시켰다. 또한 작은 키를 보완하고자 위대한 정복자가 고집했던 굽 높은 구두처럼, 지속적인 힐은 발과 발가락 관절 등에 무리를 주어 신체에 영구적인 이상을 초래했다. 한때 가는 허리를 위한 코르셋이 여성의 내장 기관을 압박했던 것처럼, 자아를 극대화하려는 선택은 언제나 육체의 자연스러운 기능을 억압하는 경계를 넘나들었다.
내가 처음 방문 간호로 만났던 한 어르신 역시 그러했다. 큰 키와 고운 얼굴, 날씬한 몸매에 긴치마를 입고 찍은 젊은 날의 가족사진은 그녀의 화려했던 과거를 웅변했다. 늘 긴치마와 높은 구두를 선호했던 그 강렬한 패션 감각은, 자신을 규정하는 자존감의 가장 중요한 표현('나')이었다. 그러나 그 치명적인 선택은 구두에 치마를 밟는 두 번의 낙상으로 이어졌다. 두 번의 고관절 수술 끝에 그녀의 삶을 병상과 함께 매장시키며 '나를 무너뜨리던 너'로 돌변했다.
처음 뵈었을 때는 생을 이어간다는 것이 2개월도 어려워 보였다. 그녀의 와상(臥床)은 단순히 육체의 쇠락이 아닌, 표현의 자유를 잃은 존엄의 침묵과도 같았다. 나와 맺은 1년의 연(緣) 동안, 우리는 따뜻한 손길과 활력 증상 관찰, 남아있는 잔존 능력 유지를 위한 손가락 놀이, 관절 구축 예방 운동을 반복했다. 자는 시간은 점점 많아지고 외부 자극에 둔화되어 갔다. 그러나 나와의 주 2회 만남과 인지 활동의 결과, 기적처럼 마지막 3개월 정도는 손을 들고 악수로 나를 맞이했다. 이 작은 악수는 패션으로 표현할 수 없게 된 어르신이 존엄을 지키고 소통하려는 마지막 의지였다.
방문 간호사로 일하며 나는 수없이 많은 어르신들에게 "나, 내일 요양원 가"라는 체념이 담긴 말을 들었다. 요양원이라는 경계는 때로 존엄의 포기를 의미했다. 나는 이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무력했다. 그러나 이 어르신의 아들은 '병원에 가시면 돌아올 수 없다'는 선택을 고집하며 어머니의 존엄을 '집'이라는 삶의 터전에서 지키려 했다. 나의 소명은 산소포화도를 관찰하고 위험한 증상을 교육하며 그들의 마지막 존엄한 선택을 지지하는 일이었다. 12월 24일 새벽은 결국 긴급 후송과 함께 왔다. 신년 1월 3일, 그녀는 1주일의 병원 생활로 화려했던 젊음과 패션 감각을 뒤로하고 우리와 이별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딱 24시간 전에 하신 "나, 내일 우리 집 가는 날이야"라는 말씀을 평생 잊을 수 없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우리 집'은 요양원이나 병원이 아닌, 삶의 모든 고통과 모순을 긍정한 후 도달하는 궁극적인 안식처였다. 어르신의 삶과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우리는 자신을 표현할 자유(개성)와 안전하게 생명을 유지할 의무(안전) 사이에서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고 표현해야 하는가?
나는 그녀의 마지막 악수와 가족의 헌신적인 돌봄을 통해 배웠다. 인간의 존엄은 '패션'이라는 외적 요소나 신체의 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경계 앞에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에 있으며, 나의 소명은 그 의지를 지지하는 '영혼의 건축가'가 되는 것임을. 이제 나는 그녀가 걸었던 치명적인 경계와 내가 넘어섰던 소명의 경계 저 너머에서, 내가 지금의 나로 서게 된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