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테드 창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을 읽고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돼 하면서도 아이는 인형을 눈 속에 처박았다. 그 위에 눈을 마구 뿌려댔다.
옷이 홀랑 벗겨져 있는 살색 플라스틱 아기 인형.
평상시는 아이가 애지중지하며 밥도 먹이고 우유도 주는 인형이었다. 다른 인형에는 관심이 없던 아이지만 그 인형만은 자기 자신을 돌보듯 주의 깊게 돌보며 예뻐하던 인형이었다.
무슨 일인지 아이는 눈 구덩이에서 인형을 빼내어 손바닥으로 때리기 시작한다.
탁 탁 아이의 손이 딱딱한 플라스틱 인형에 부딪혀 얼얼한 통증이 느껴진다.
그러나 아이는 멈추지 않는다. 때리고, 던지고, 밟고.
가속도가 붙은 폭력은 한바탕 발작하듯 휘몰아쳐 지나간다.
해가 서쪽에 걸린 눈 쌓인 주택가 골목. 아이는 제풀에 지쳐 풀썩 주저앉는다. 지나는 사람은 없다.
눈에 처박혀 아이 쪽을 바라보는 인형이 있을 뿐이다.
당신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당신 성격의 일부가 되고, 당신이라는 사람을 형성하니까요.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의 냇은 자기 파괴적인 삶을 살아간다. 마약중독으로 가족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겼고 마약을 끊고 있는 지금은 자잘한 사기에 가담하며 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부수익도 얻고 있다.
냇이 사는 세상은 ‘플라가 세계 간 신호 메커니즘’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평행세계의 또 다른 버전의 자기 자신과 의사소통할 수 있다. 양자역학의 다세계는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버전의 평행우주들로 끊임없이 분기해서 여러 버전의 자신이 있는 시간선이 존재한다.
냇은 끊임없이 갈라지는 여러 갈래의 한 시간선의 존재이고 다른 평행세계의 시간선에서는 다른 버전의 냇들이 살아가고 있다.
냇과 함께 일하던 동료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냇은 살인자가 한 말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살인자는 자기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더라도 다른 시간선에서 다른 버전의 자신이 방아쇠를 당길 텐데 그렇다면 어차피 지금 자신이 방아쇠를 당긴 들 그게 무슨 대수냐며 동료에게 총을 쐈다.
냇은 이쪽 버전에서 좋은 행동을 하더라도 다른 시간선에서 못된 행동을 하는 자신이 있을 텐데 이쪽에서의 좋은 행동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고민에 빠진다. 지금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냇이 상담 모임에 가서 고민을 토로했을 때 상담사 데이나는 이 세계에서 선하게 하는 선택을 한다면 미래에 다른 버전의 자기 자신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될 거라 이야기한다. 선한 일을 할 때마다 스스로를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만들어 가고 있으며 그것은 미래에 다른 시간선에서 살아가는 모든 버전들에게도 변화를 심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냇은 지금의 자기와는 다른 더 나은 버전의 냇을 원한다. 마약중독으로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기 치는 일에 쾌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길 원한다.
비네사는 상담사 데이나를 찾아간다. 새 출발을 위한 대학 등록금을 부탁하기 위해서다. 그전에는 사업을 한다고 돈을 빌려 가기도 했다.
둘은 학교 친구였고 견학 여행 때 파티를 위해 몰래 가져온 마약성 진통제인 비코딘을 선생한테 들킨다.
데이나는 이것이 무슨 일이냐는 선생의 질문에 그 약이 비네사 거라고 거짓말로 둘러댄다.
그 후 비네사는 정학 처분을 받고 비행을 저지르고 분노를 표출한다. 비네사의 인생은 나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데이나는 그것이 자신 탓이라고 생각한다.
데이나는 비네사가 자신의 죄책감을 이용하여 돈을 빌리는 줄 알고 있으나 거절하지 않고 준다. 자신 때문에 비네사의 인생이 나빠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평행세계의 다른 시간선의 데이나의 영상 여러 개를 보내 준다.
첫 번째 영상에서는 마약성 진통제가 모두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데이나가 있다. 데이나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으나 비네사는 죄책감을 느껴 데이나를 멀리한다. 불량학생과 어울리기 시작하고 마약을 팔다가 퇴학당한다.
데이나는 자신이 선생한테 솔직하게 말했어야 한다며 죄책감을 느낀다.
데이나가 자신과 비네사가 같이 가져온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평행세계에서는 비네사가 잡아떼지 못했다고 데이나를 비난한다. 그 후 둘은 학교 처벌을 받고 비네사는 술을 마시고 등교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퇴학처분을 받는다. 데이나는 자신이 솔직하게 말해서 비네사가 나쁜 행동을 한다고 죄책감을 느낀다.
다른 동영상에서는 데이나가 소개해 준 남학생으로 인해 비네사가 마약에 빠졌다고 데이나가 자신 탓이라고 자책하고 있다. 몇 가지 버전의 평행세계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
비네사는 자멸적인 행동 패턴에 빠지고 데이나는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한다.
현재 버전에서 비네사는 데이나의 거짓말 때문에 자신이 인생을 망치게 됐다고 생각하며 데이나에게 돈을 가져가지만 여러 평행 버전들의 비네사의 행동을 본다면 그것은 데이나의 거짓말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비네사가 항상 자멸하는 방향으로 선택하고 행동한 탓이다.
냇은 자신과 반대되는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선하게 행동하기 힘들었던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 탓이라고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선택을 여러 번 했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비네사는 여전히 그것을 모른다.
아이는 눈 속에 박혀 있는 인형을 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가 생각한다. 학대당한 후의 모방 행동이었든지 어린아이로 살아가야 하는 스트레스 꼭대기에서의 행동이었든지 인형을 때린 건 그 누구도 아닌 아이 자신이다.
오른쪽이 있고 왼쪽이 있어. 오른쪽은 살리는 사람이고 왼쪽은 죽이는 사람이야. 네 안에는 왼쪽에 서는 사람이 있는 거야라고 아이는 생각한다.
폭력을 쓰는 야수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라고, 복수심에 불타는 괴물 같은 존재가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인형을 때리는 경험으로 아이는 오른쪽 사람도 알게 됐다. ‘당장 그만둬. 지금 뭐 하는 거야’라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치는 자신 안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도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는 선택이 남았다. 어느 쪽 사람으로 성장할지.
파괴적인 경험을 되풀이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인형을 때린 경험으로 아이는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 행동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조심만 한다면 그러한 행동을 안 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왼쪽의 야수가 아무리 으르렁 거린다 해도 고삐를 쥐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 누구도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당신은 다음번에도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건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해지는 골목은 어둠에 잠기려 하나 주택가의 불들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노랗고 하얀 불빛 속에서 아이는 인형을 조심스레 안아 올린다.
인형의 심장이 펄떡이는 듯 느껴져 아이는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자신의 잔악한 행위를 대면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미안해라는 말이 울려 나온다.
많이 아팠겠구나 추운 겨울날 눈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