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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남북녀 Apr 19. 2021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할란 엘리슨 걸작선

최소한의 삶을 살고 싶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 직장에 매여 있을 때니 한 십 년은 지난 일인데, 나는 여전히 최소한의 삶을 살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삶은 식물과 비슷하다. 한자리에서 떠나지 않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비 오면 오는 대로, 바람 불면 부는 대로 견뎌내는 것. 변화를 오게 하기 위해서 힘들게 에너지를 쓰기보다는 변화를 오게 하지 않기 위해서 약간의 애를 쓰는 것.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에 원망도, 분노도, 노력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그저 그렇구나 하고 지나가게 하는 것.


미로 같은 도서관을 돌아다니다가 하얀색 표지의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는 제목을 보고 들고 나왔다. 설명을 보니 작가가 천재로 불리는 데다 이력도 다양하다. 상도 여러 개 탔다는데 전혀 모르는 작가다. 웬만하면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는 요령 없는 독서를 하는 편인데 이 책은 두 권짜리 중 두 번째 책이다. 걸작선이라도 1권이 올 때까지 기다려 1,2권을 한꺼번에 빌려 순서대로 읽었을 텐데 현재 있는 2권만이라도 먼저 빌릴 정도로 제목에 끌렸다. 대체 저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었다. 비명을 질러야 하는데 입이 없다니, 저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책을 쭉 읽고 나니 저 말이 고통에 관련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명이 나오는데 입이 없어 비명을 지를 수 없는 상황, 고통으로 죽을 수도 없는 상황은 인간이 느끼는 최대치의 고통을 표현한다는 생각이. 현재 인간의 상태가 그렇다는 것을. 또는 이대로 가다가는 비명을 지르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는.


세상이 고통 중에 있는 것은 인간이 이유가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만 봐도 무분별한 환경파괴가 원인이라고들 한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지며 지구의 오염도는 나날이 상승하고 있고 환경이 파괴되며 생태계는 해로운 바이러스를 출현시켰다. 어찌 보면 자업자득의 결과다.

그럼에도 나는 꽃을 보고 싶어 한다. 땅 밑의 지하세계나, 오염도가 심해 모유를 먹이지 못한다는 북극에 대해, 온난화로 생태계가 파괴되어 먹을 게 없어 서로를 잡아먹는다는 북극곰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얗고 붉게 꽃 피우는 계절에, 살랑살랑 꽃잎이 날리는 계절에 일부러 멀리까지 가서 걱정, 근심을 붙들어 매고 싶지 않다.


이런 것이 최소한의 삶이다. 고통을 멀리하는 것, 고통을 일으키는 어떤 것을 보지 않는 것.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는 제목이 마음을 끌어당긴 것은 고통이 말을 거는 거였다. 귀찮다고 치워둔 고통이.


선한 사람이라서 지구의 온난화나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통을 느낀 다기보다는 고통스러울까 봐 미리 방어막을 치기 때문에, 미리 차단하기 때문에 ‘차단’ 그 자체가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외면하는 데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외면 자체가 문제가 된다.


단편 중 <마노로 깎은 메피스토> 루디 패리스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뭐든지 빨리 배운다. 불가타 라틴어는 1주일에 떼고, 표준 약전은 사흘이면 외운다. 머리가 좋은 편이며 고아지만 좋은 양부모 밑에서 자랐다. 피부색이 검지만 장학생으로 교육도 잘 받았다. 그러한 능력과 지능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한다. 삶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읽는 능력으로 더 비참하고 공포스러운 삶을 산다. 그는 제대로 살지 못한다. 사랑 앞에서도 감추고 숨기고 망설인다. 그런 그가 알게 된다. 자신을 실패자로 만든 것이 무언지, 책임지는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언지. 자신은 검둥이기 때문에 끔찍한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에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야 최소한의 삶을 원하는 이유를 조금 알게 됐다. 어린 시절 울부짖는 사람들 속에 있었고 살던 집이 부서지는 경험을 했다. 상징적인 집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고 먹고 텔레비전을 보던 공간이 타인에 의해 의해 부서졌다. 그것은 꽤 예전 일이지만 그것이 남긴 것은 공허함이다.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주춤거리게 하는. 어차피 무너질 일인 것을. 이 세상이라는 곳에서 이뤄지는 일들이.


지금이라는 시간을 감정의 기복 없이 온화하게 지나고 싶어서 여러 일들에 고개를 돌린다. 마음을 쏟고 그것을 위해 싸우고 달려가야 일들에서는 피로감이 먼저 달려든다. 그것을 성취해서 느끼게 될 기쁨보다는.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는 제목 자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온화하기 위해 쌓아 둔 부산물이라면 부산물의 비명을 들어야 한다는. 치워둔 고통을 알아봐야 한다는. 내 개인적인 일이니 그것이 아주 거대한 것은 아니겠으나 꽃과 지하세계를 동시에 봐야 온전해질 것이라는 메시지라면 메시지 일수 있겠다. 어둠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빛만 보며 살 수는 없는 거니까.


사랑의 힘은 틈을 열 수 있다는 헛소리는 하지 말기 바란다. 그런 개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나를 열어젖힌 것은 수많은 요소의 결합이었고, 아마도 그중 하나가 내가 그 두 사람 사이에서 본 사랑이었을 것이다.”


마음에 든 문장이고, 책 속에는 이런 문장이 많다. 작가가 천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내용과 문장들이 꿈속에서 보는 것처럼 이미지가 강력하다. 빛보다는 어둠으로 이끌어가는 소설이라고 생각했으나, 다 읽고 보니 빛이니 어둠이니는 아직 내가 나눌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너뛴 1권도 읽을 생각이다. SF라는 내게는 생소한 방법으로 말을 걸어오는 책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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