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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남북녀 Aug 14. 2024

수박찬가

일상과 읽기

이번 연도 처음으로 에어컨을 가동했다. 실내 온도가 35도를 나타낸 입추 전 날이다. 바람은 불어오지 않고 공기는 눅진했다. 더위에 지쳐 낮잠에 들었다 깬 후 더 이상은 안 되겠어, 말한 후 송풍으로 작동하던 에어컨을 냉방으로 전환했다. 아직 괜찮은데 말하는 남편은 내가 낮잠에 든 동안 베란다에 빨래를 널고 직장에서 가져온 서류 작업을 마쳤다. 최고로 더운 여름날 땀 흘리면서   

  

이 과일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진작에 에어컨을 작동시켰을 거다. 이른 아침 집안일을 하고 나면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때 잠깐 쉬며 먹는 붉은 과육의 달콤함은 다른 어느 과일과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입안에서부터 느껴지는 차가움. 이 차가움은 사라지지 않고 가슴 깊은 곳까지 도달한다. 한 통을 구매한 후 조각으로 잘라 냉장고에 놓아두면 우리 집에서는 이 삼일이면 바닥을 드러낸다. 다시 또 한통을 사서 자르고 냉장고에 쟁여놓는다.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 과일이 없었다면 여름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울까. 에어컨을 내내 가동하고 지냈다면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는 이 과일의 매력을 알지 못했을 거다. 땀이 줄줄 흐르기에, 더위로 달아오르는 얼굴로 붉은 과육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이 과일을 많이 먹어 이불에 오줌 쌌다는 아이의 어이없는 핑계가 수긍될 정도로 수박을 실컷 먹는 여름날들, 푹푹 찌는 무더운 날들  

   

더위를 이겨 보고자 빌린 책 중 하나로 정한아의 <친밀한 이방인>이 있다. <안나>의 원작인 것은 나중에 알았다. 보고 싶지 않은 일상에서 멀어지는 방법으로 거짓말의 성을 쌓는 이유미. 육아와 가정일로 커리어를 놓쳐버린 작품 속 작가는 불륜으로 치닫는다. 초라해진 자신을 초라할 자신을 보지 않으려는 하나의 방법은 기만인가. 가장 먼저 속여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실체가 없는 성은 옷깃만 스쳐도 와르르 무너진다.

    

여름이면 땀 흘리는 것, 땀 흘리는 더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역시 정직이다.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 덥다, 아주 많이. 기다린다, 가을을 혹 겨울을

     

수박을 보며 덧붙이는 말) 겉과 속이 다른 건 괜찮은 일이다. 달콤하고 시원하고 잘 뭉개지는 과육을 보호하기 위해 수박의 겉은 이렇듯 단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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