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하라면 무엇이든지 합니다.

공군 정비사가 준비한 국군의 날 지원 이야기 2

by 카레맛곰돌이

군대는 까라면 까는 곳이다. 옛날 말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직도 그렇다. 군대는 까라면 까는 곳이고 하라면 하는 곳이다. 그래서 노상에다가 방치해 놓는 동계 작전용 엔진 녹을 벗기라는 바보 같은 요구를 하기도 하고(애초에 녹을 방지하고 싶으면 노상에 방치하지 않으면 된다.), 정비사가 모자라 빌빌거리는 와중에도 제초기는 꼭 사람의 손으로 돌리라고 사람을 보내고는 한다. 하지만 이번 이야기는 조금 규모가 달랐다.


다른 부대에서는 어떻게 국군의 날을 지원할까. 육군에서는 막 퍼레이드 준비를 하면서 몇 달간 훈련을 한다고 하는데. 국군의 날 지원 행사를 준비해 보면 재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가지고는 했었는데 막상 내가 해보니 별로 재밌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한 일은 행사 준비라고 하기엔 막노동에 가까운 일이었고.


오늘은 그 두 번째 이야기다. 모인 정비사들은 정비공장을 완전히 비우고는 바닥에 칠해진 왁스를 깨끗하게 닦고 주기된 페인트까지 지우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거 사람 불러서 하면 안 되나, 당시에 수없이 생각하며 일했지만, 이런 생각에 대한 대답은 하나로 귀결될 뿐이었다. 여기는 군대다. 까라면 까는 곳.





"오늘 정비공장에 있는 모든 왁스를 지울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 주기된 페인트도 모두 지우고요."


선언과 함께 구루마에 40L는 족히 들어갈법한 파란 물통이 실려왔고 그 뒤로 세척제가 같이 따라왔다. 아무리 봐도 바닥에 뿌려놓고 닦는 용도의 세척제는 아니다. 항공기 장비 세척용, 인체에 무해하다고 검증은 받았지만 모두 피부에 닿기 무섭게 물에 박박 씻는 녀석이었다.


"인체에 무해한 세척제기는 하지만 눈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서 닦아주세요. 세척 솔하고 걸레는 저기에 쌓여 있으니까 저걸 써주시고, 고무장갑은 각자 가져오신 걸 사용해 주세요."


아까 중대에서 급하게 움직이는 이유가 이거였나.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준비된 많은 걸레, 중대마다 싹싹 긁어모은 고무장갑, 급하게 돌아다니던 화학물질 담당자, 전부 오늘의 쇼를 위한 밑준비였다.


행정장교의 이야기에도 모두의 입에서 웃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단지 장난기 어린 웃음이 상부를 향한 조소로 바뀌었을 뿐. 책상 위에서 펜이나 굴리는 지휘관들은 바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공군에서 하는 최초의 국군의 날, 예산을 사용해 외부 인력을 데려다 공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냥 내부에 있는 인원들로 청소하고 처리하면 되겠지. 정비 일정은? 남은 인원이 알아서 맞추면 되는 거고.


다들 머뭇머뭇, 미적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 당연하지만 없다. 부사관과 병사들이 뭘 할 수 있겠는가. 이제야 현실을 깨닫게 된 이들은 저마다 가져온 고무장갑에 솔을 들고는 물을 땡겨와 파란 물통부터 채우기 시작했다. 누가 이런 짓을 시키는 걸까. 오늘 이러고 있으면 내일은 야근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저마다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방법은 빨리 청소하는 것뿐이다.


세척제를 섞은 물은 여전히 투명했지만 표면에 무지갯빛 반사광이 걸렸고, 우린 그걸 바닥에 뿌린 다음 솔로 바닥에 넓게 펼쳤다. 쓱싹쓱싹, 거대한 정비공장에는 이윽고 솔질소리로 가득 채워졌고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된 후에야 행정장교는 다른 일이 있다는 듯 자리를 비웠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일찍 끝날 거 같았던 일은 생각보다 진척이 빠르지 않았고 결국 일과가 끝날 때 우리도 같이 청소를 끝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마를 때까지 하루, 이틀 기다렸다가 왁스칠을 할 겁니다. 그때도 지금 인원이 모인다고 생각해 주세요."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그 자리에서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군대는 까라면 까는 곳이다. 상부의 지시가 어쨌든 업무에 속한 일이라면, 그러니까 부당하지 않은 일이라면 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왁스칠, 이렇게 많은 인원의 손으로 하는 왁스칠이 과연 똑바로 될까. 모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며칠 비가 왔다. 정비공장의 물기는 걸레로 대충 훑었지만 여름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서 바닥은 축축하게 젖었고 집 잃은 정비사들은 며칠간 다른 이의 작업장을 떠돌고는 했다. 정비공장에 있던 항공기들은 어디 멀리 이글루에 주기하고 있다던데. 그 녀석들도 빨리 집에 돌아오고 싶지 않을까.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들을 데려오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3일간 내리 내리던 비가 그치고 난 후의 아침, 정비공장에는 이전과 같은 숫자의 인원이 모였다. 병사, 하사, 그리고 초임 중사들까지 부대의 주춧돌 역할을 하는 이들. 그들은 자신의 임무를 떠올리고 있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왁스칠, 기계를 이용해 올곧게 칠하지 않으면 분명 빛이 난반사되고 군데군데 칠해지지 않거나 과하게 칠해진, 끔찍한 작업환경이 될 텐데 지휘관들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시키는 걸까.


우리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며칠 전과 같은 행정장교가 단상 위에 올라섰고 우리의 앞에는 물통 대신 왁스통이 놓였다. 공병들이 쓰고 있는 물건이었다. 지난번에 쓰다 남은 걸레들로 왁스를 찍어서 넓게 발라주세요. 그는 그 이상으로 어떻게 왁스를 잘 칠하면 좋을지 계획이 없는 모양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알아서 잘해주기를 바란다는 눈치였다. 애초에 자기도 왁스를 칠해본 적이 없으니 우리에게 뭐라 말해줄 것도 없었겠지.


무계획에 우리가 계획을 얹을 수 있을까. 뭐, 절반 정도는 계획을 얹었다. 대충 쓱쓱 바닥을 칠하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대대에서 유명인사라 불리는 한 선배가 지휘에 나선 것이다. 모두 왁스를 걸레에 바르고 일자로 길게 서서 쭉 밀며 발라보자. 그렇게 하면 분명 덜 발릴 텐데. 생각이 들더라도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정비사들은 일자로 줄을 서서 쭉, 정비공장을 가로지르며 왁스를 발랐다. 작업 끝, 왁스를 칠하는데 또 하루를 썼고 기름 냄새, 땀 냄새, 더러는 거뭇거뭇 얼굴과 손, 옷 어딘가에 묻은 왁스로 오늘 작업의 고됨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일들을 국군의 날 지원 행사라고 할 수 있나. 다들 이렇게 일할 거면 국군의 날 행사는 육군에게만 맡기자는 목소리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군대인 것을. 저마다 인사를 나누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을 빼앗긴 정비공장의 정비사들만 빼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왁스는 엉망진창으로 칠해졌고 우리는 왁스를 지우기 위해 며칠 후 다시금 모였다. 또 멍청하게 왁스를 지우고 며칠, 이런 식으로는 국군의 날 이전까지 작업을 못 끝내겠다 싶었는지 지휘관들은 그제야 왁스를 칠하는 외부 용역을 불렀고, 사람의 손으로 꼬박 하루를 칠해도 모자랐던 정비공장은 불과 몇 시간 만에 기계로 깔끔하게 도포되었다.


정비사들은 책상 위에서 펜대만 굴리는 지휘관들을 제일 싫어한다. 어떻게든 비행기를 띄워라, 어떻게든 엔진을 고쳐라, 언제까지 비행을 해야 한다. 거기에 기술적인 판단은 없다. 오로지 정무적인 판단과 때로는 항공기의 가동률, 더 나아가 자신의 진급을 위한 판단밖에 없다. 그래서 정비사들은 책상 위에서 펜대만 굴리는 지휘관들을 제일 싫어한다. 차라리 가끔 얼굴이라도 비추면서 배우는 태도라도 보이길 바란다. 그러는 인물은 극소수지만.


이후 국군의 날 행사에 대한 이야기는 굉장히 조금 남았다. 대충 내가 당일 근무에 들어갔고, 후배 몇 명이 대통령과의 식사 자리에 초대되었고, 그들은 맛있는 밥을 먹고 당직 근무자들도 맛있는 밥을 먹었지만 비행, 정비 지원 당직 근무자들만 도시락이 지급되지 않아 도시락값 얼마 한다고 여기 당직 근무자들은 밥도 직접 알아서 먹으라고 뒷말이 나왔다는 후일담정도. 그리고 후배 한 명이 TV와 유튜브에 나올 때 너무 예쁘다고 반응이 좋아서 달력 모델로도 채택되었고... 이상한 이야기가 많지만 솔직히 아무래도 좋다. 그보다는 다음 이야기는 뭘 다룰지 고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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