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레맛곰돌이 Apr 30. 2024

9. 폭풍의 언덕 - 민음사

폭풍이 치던 날, 대문 앞 배수구의 허용량 이상으로 비가 내렸고 신발장에 물이 쏟아졌다. 태풍 매미가 지나갔던 날의 기억이다. 그날 우리 가족은 쓰레받기로 물을 퍼서 밖에 던졌고, 신발장에 쌓인 물은 밖으로, 밖에 쌓인 물은 다시 신발장으로 들어오며 가족을 괴롭혔다.


 폭풍이 치던 날, 부대 정비 헹거의 지붕이 날아갔고 F-15가 하염없이 비를 맞았다. 모두가 잠든 시간 새벽 4시, 우리는 우비를 뒤집어쓰고 작업장으로 나가 물을 쓸었다. 하늘은 그런 우리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를 더 거세게 쏟았고, 결국 아침 7시까지 물을 밖으로 쓸어내다 아침밥을 먹으러 가며 다른 팀과 교대했다.


 폭풍은 사람의 인생을 뒤바꿀 수 있는 재앙이다. 우리 가족은 신발장에 물이 차는 것으로 그쳤지만 그때 누군가는 집이 물에 쓸려 나갔다. 우리는 지붕이 날아가 비행기가 젖는 정도로 그쳤지만 그때 누군가는 자동차가 침수되고 도로에 갇혀 차 위에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의 서평은 폭풍우 치던 날 언덕 너머로 사라졌던 이의 귀환과 두 집안의 파멸, 그리고 폐허에서도 피어나는 꽃에 대한 이야기다.




영문학 최고의 걸작이라고 불리는 '폭풍의 언덕'(을유문학사 판본에서는 '워더링 하이츠'로 원어 그대로 번역)은 한국에서도 이름을 모르는 이가 드물정도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로맨스판타지 장르의 소설을 쓰고 싶은 작가라면 다른 작품들을 참고하기 전 이 소설을 먼저 읽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해당 소설의 위상은 대단하다. 1840년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웹소설을 쓰기 위해서 읽으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그 정도로 전개가 흥미진진하고 요즘 소설에서도 본받을 점이 많다는 의미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폭풍의 언덕'은 해외 고전을 다루는 출판사라면 출간 목록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인기가 좋은 작품인데, 그중에서도 국내에 널리 알려져 있는 판본을 꼽는다면 민음사와 을유문화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은 표지부터 비교점을 보인다. '폭풍의 언덕', 익히 알려진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민음사(이하 민음)와 '워더링 하이츠', 원어를 그대로 번역해 표기한 을유문화사(이하 을유). 이 부분에서 흥미를 느끼고 양 판본을 비교해 본다는 마음으로 책을 펼치는 독자가 있다면 그 후에는 더 재밌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1권, 2권을 표기해 주는 을유와 오로지 장 단위로만 차례를 나눈 민음. 요크셔 지방의 사투리를 표현하기 위해 사투리로 번역한 을유와 표준어로 표기한 민음. 그 외에도 세세한 문장 번역의 차이를 보면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다른 독서 경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판본이 많은 책의 장점은 이거다. 같은 번역본을 읽음에도 불구하고 완역에 가깝냐 직역에 가깝냐에 따라 독서 경험이 달라지고, 사투리, 고유명사, 표현의 접근 방식에 따라 때로는 색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굳이 다른 출판사라는 이유만으로 2번 읽는 사람이 어디 있냐?'라고 말한다면 증명할 수는 없지만, 정말 독서를 좋아하고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분명히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독서커뮤니티에 가보면 고전 문학 번역은 어디가 좋냐는 질문은 늘 나오는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고, 민음사의 표지가 예뻐서, 펭귄하우스의 검은 표지가 꽂아놨을 때 정갈해서, 을유문화사의 갈색 표지가 책장과 잘 어울려서 와 같은 답변도 흔히 나오는 답변들 중 하나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일부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A도서는 민음사 번역이 좋고, B도서는 을유문화사 번역이 좋다. 하지만 민음사를 좋아한다면 B도서도 참고 읽을만하다.'하고 디테일한 답변을 주기도 한다. 매니아들에게 고전 소설은 내용만이 포인트가 아니다.


 최근 더스토리의 리커버 한정판 초판본 데미안을 본 적이 있었다. 검은색 벨벳 양장에 금박으로 박힌 필기체, 책장에 책을 꽂아 넣는 것이 삶의 낙인 독서광들이라면 눈길을 안 주고 지나가기 어려운 디자인이었다. 그걸 보고 인터넷에 더스토리의 데미안 번역에 대해 찾아봤다. '아무리 예뻐도 민음사 판본 읽겠다'. 디자인은 일반 독자층의 마음을 흔들 수는 있어도 고전 문학을 탐독하는 독서광들까지 흔들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결국 근본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민음과 을유는 같은 작품으로 2가지 다른 길을 보였다. 그 와중에도 퀄리티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휴머니스트, 열린책들과 같은 쟁쟁한 출판사들이 '폭풍의 언덕'을 출간했음에도, 아직까지도 고른다면 민음, 아니면 을유를 고르라고 말이 나오지 않나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고민하고 의견을 나눈 '폭풍의 언덕'과 '워더링 하이츠'라는 제목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솔직히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솔직히 처음 읽을 때는 '그래서 폭풍의 언덕이 왜 제목인데? 지금 내용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생각은 히스클리프가 상처받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언덕 너머로 사라졌을 때 말끔히 사라진다. 폭풍이 치는 언덕은 그를 가려줬고, 그 언덕을 넘어온 히스클리프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두 집안을 파멸로 이끈다. 서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폭풍은 누군가의 삶을 뒤바꿀 수 있는 재앙이다. 매미, 더 근래에는 힌남노, 모두가 폭풍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공포와 변화를 알고 있다. 히스클리프는 폭풍의 품에 안겼고, 폭풍이 되어 두 가족의 재앙으로 다가왔다. 그 후 폭풍이 끝나고 다시 일어나는 이들처럼 피어나는 사랑과 파멸하는 그의 최후까지. '폭풍'이라는 단어가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있을까.




어제 책을 반납하고 후회했다. 생각해 보니까 인스타에 서평을 올리기 위해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책을 반납하지 말아야 했는데. 멍청함에는 약도 없다고 하더니 그 생각을 수없이 해놓고서는 결국 반납했다.


 개인적인 감상평이라면 일반 독자라면 지루하다고도 느낄 수 있는 고전 소설스럽지 않았고, 너무 재미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1권의 이야기를 보면 한국판 사랑과 전쟁이다. 천연 팜므파탈 같은 캐서린의 모습에, 그녀가 거침없이 발산하는 끼에, 히스클리프와 그녀의 사랑(혹은 불륜)을 보고 있으면 이마를 안 칠 수가 없다. 새벽에 책을 읽으면서 이마를 얼마나 쳤는지...


 영문학의 걸작, 야생성과 문화의 교류와 융합, 인간의 파멸과 사랑, 백인 사회에서 흑인이 가지는 위치와 1800년도 여성의 지위. 해석하자면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싶다. 괜히 어려워 보이지 않는가? 나는 이런 말은 전부 빼고 이야기하겠다. 재밌다. 재밌으니까 읽어보면 좋겠다. 웹소설 좋아하는 사람도 읽어보길 바란다. 단테의 신곡을 들이밀면서 '재밌으니까 읽어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다(어렵고, 복잡하며, 철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재미를 느낄 요소가 거의 없다). 하지만 폭풍의 언덕은 재밌다. 재밌으니 한 번쯤 읽어보면 좋겠다. 그리고 '이거 무슨 드라마에서 본 거 같은데?'하고 생각하며 웃고 즐거운 독서 경험을 얻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8.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 현암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