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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대고려연방 (44)

북경선언 6

by 맥도강 Mar 22. 2025

다분히 의도되었던 북경대에서의 소란을 뒤로한 채 대통령은 다음 일정인 ‘한중무역엑스포’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두 시간을 날아서 요녕성 선양시에 당도했다.

요녕성 당서기인 위펑의 영접을 받으며 개막식 행사에 참석한 대통령은 해거름녁이 되어서야 상그릴라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내일아침 다시 북경으로 이동하게 되면 방중 기간 가장 중요한 일정들이 연속적으로 줄지어 있었다.

오전에 예정된 확대정상회담을 마치면 곧바로 시 주석과의 오찬 일정이, 저녁에는 리 총리와의 만찬일정까지 잡혀있었다.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는 살인 스케줄을 앞두고 잠깐의 여유 시간을 활용하여 욕실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이때 위펑 당서기와 함께 황급히 들어온 주중대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님 큰일 났습니다!”

방금 샤워를 끝내고 소파에 앉은 대통령은 마치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주중대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주석과 총리 두 분께서 갑자기 몸이 불편하셔서 내일 확대정상회담과 이후의 일정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대통령의 옆 자리에 서 있던 윤 비서관마저도 전혀 놀라지 않는 태도로 말했다.

“북경대 연설에 대한 중국 측의 첫 반응인 것 같습니다”

이 같은 엄청난 외교적 결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우리 측보다는 오히려 당황한 쪽은 위펑 당서기였다.

북경으로부터 전달받은 지시사항이라며 황망한 표정으로 대통령에게 말했다.

“대통령님께서 일정을 단축하여 이대로 귀국하신다면 양국의 우호관계에 오해하는 여러 말들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기왕에 저희 지역을 방문하셨으니 이후의 일정을 여기서 소화하시는 것이 어떨지를 제안드립니다!”  


북경의 의도는 명확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 기분 나쁘면 그냥 보따리를 싸도 좋지만 가능하면 동북지방의 촌구석에서 두어밤 더 자고 가라는 메시지였다.

중국에 대항하는 주변국에 대한 본보기로 삼겠다는 뜻으로서 이것은 홀대의 차원을 넘어선 이웃나라 국가원수에 대한 모독이었다.


위펑 당서기도 얼마나 무안했던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지만 대통령의 태도는 의외로 쿨했다.

“주석과 총리께서 갑자기 몸이 불편하시다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면 서기장님의 말씀대로 양국 간의 관계에 대한 여러 말들이 만들어질게 뻔 하니 참으로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기장님! 남은 일정을 뭐 하면서 보냈으면 좋겠습니까?

따로 생각하신 거라도 있으신지요?”


대통령이 편하게 웃으면서 말하니 위펑 당서기도 다소 마음이 놓였던지 나름대로 준비해 온 프린트 물을 대통령에게 내어놓았다.

“그래요 한번 봅시다!,

내일 일정표가 조찬에 고궁유적지나 둘러보고, 또 오찬에 장성유적지나 둘러보고, 또 만찬에 밥 먹고 자고 그것으로 땡이네요,

모레는 또 조찬에 선양 타오센공항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군요,

이쯤 되면 내가 중국까지 와서 관광한번 잘하고 가는 격이 되겠습니다,

뭐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어째 좀 밋밋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입니다”


서기장 자신이 보더라도 이건 좀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뒤통수를 긁어가며 머쓱해하자 대통령이 대뜸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서기장님! 기왕에 관광을 할 바에는 그 대신 좀 편안하게 둘러보고 싶은데 양해를 해 주시겠습니까?”

대통령의 진의를 알턱이 없던 위펑 당서기는 북경으로부터 물먹고 자신의 관할지역에서 잠시 머물게 된 대통령을 가급적 배려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디 특별히 방문하고 싶은 곳이라도 계신다면 경호상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서기장의 호의에 고맙다는 표정으로 대통령이 답했다.

“서기장님이 주신 관광자료를 꼼꼼하게 검토해 보고 내일 아침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위펑 당서기가 물러나자 대통령의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였다.

국내에서 구상했던 대로 실제로 플랜 B를 가동하게 된 것이다.

플랜 A는 중국이 대국답게 처신한다는 전제하에 짜인 계획이었다.

기존의 일정표대로 움직이면서 정면으로 맞대응하는 전략이었다.

반면에 플랜 B는 중국이 어제와 오늘처럼 좁쌀처럼 대응할 때를 대비한 전략이었고 대통령은 내심 이런 상황을 더 선호했다.

중국의 수도 북경 한 복판에서 시작된 작전명 ‘역린 비틀기’는 동북지방으로 자리를 옮겨서 본격화되었다.

지금부터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용의 숨통을 더욱 바짝 조여서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쟁취할 시간이다.    


바람결에 스쳐 지나가는 향기만으로도 여기가 서울 속의 중국임을 느끼게 해주는 대림전철역 12번 출구,

사십 대 초반의 두 사내가 건축현장 노동일을 마치고 언제나처럼 차이나타운 거리로 들어섰다.

대림중앙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차이나타운 거리의 저녁 불빛들이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언제나 여기선 고향의 정취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속에 연길시장을 통째 옮겨놓은 듯 하루 종일 중국동포들로 북적거리는 이 거리에서 만큼은 이국땅에서의 긴장감이 날아가는 기분이다.


기수와 경태는 5년 전 한국으로 건너와 돈이 되는 일이라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둘 다 기본 바탕이 어질고 손끝도 야무져서 이곳 시장사람들 사이에선 억척이 총각들로 불렸다.

시장뒷골목을 돌아 낡은 3층 건물의 옥탑 방으로 올라가기 위하여 철재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였다.


골목 한쪽에서 낯익은 건달패 예닐곱 명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의! 연변 억치기들! 왜 이제야 오는 거야, 한참을 기다렸잖아”

동북 3성 일대를 무대로 상인들을 갈취하고 특히 우리 동포들에게는 무슨 악감정이 그리도 많은지 딱히 이유도 없이 폭력을 일삼던 장백산천지회 패거리들이다.


얼굴에 칼자욱이 있다 하여 칼치로 불리는 자가 중간 보스였는데 오징어 다리 하나를 지근지근 씹어가며 두 사람에게 아래로 내려오라 손짓했다.

기수와 경태는 연변에 있을 때부터 이들 조직이라면 치를 떨었는데 한국에 와서까지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뭡니까? 우리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요?”

경태 뒤에서 철재계단을 오르던 기수가 호기롭게 대꾸하면서 먼저 내려왔다.


가까이서 본 칼치의 얼굴은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험상궂었다.

그가 씹던 오징어다리를 기수의 얼굴에 툭툭 치면서 깐죽거리듯이 말했다.

“그래 이 연변 떨거지 새끼야! 볼일이 있으니까 한 시간째 이 추운 데서 벌벌 떨고 있었겠지,

그냥 심심해서 우리가 이러고 있었겠냐?”  

순간 경태가 분통을 참지 못하고 대어 들려고 하자 기수가 막아서며 칼치에게 다시 말했다.

“댁들하고 길게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용건만 빨리 말하고 각자 볼일 보러 갑시다!”


이때 칼치 앞에 서있던 다른 건달패 두 명이 갑자기 품속에서 시퍼런 식칼을 꺼내더니 기수와 경태의 목에 들이대었다.

칼치가 다시 오징어 다리를 씹어가면서 기분 나쁜 표정으로 말한다.

“그건 우리가 하고 싶은 애기고, 너거들 배 교수 제자들인 거 다 알고 왔으니까 시치미 뗄 생각들일랑 애당초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한국으로 시집온 배 교수딸 배은하 지금 어디서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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