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채우지 못한 물그릇이 생각났다.
오늘 야근 각오해.
별안간 상사의 지시가 떨어졌다. 팀장님의 표정은 다른 때보다 훨씬 더 굳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였다.
최근 며칠 동안, 이번 사업 보고 때문에 회사일이 정신없이 바빴다. 우리 회사는 교육청에서 진행하는 사업에 공모하여 방과후학교나 복지관, 지역아동센터 등으로 강사를 파견하는 교육서비스 사업을 주로 하고 있었다. 나는 예산에서 지급되는 강사비 관리, 세금신고, 재료비 및 교구비 관리 등을 담당했다. 4월부터 시작된 사업은 6월, 9월, 11월에 예산-실사용 대비 현황을 보고하게 되어 있다. 마침 지금은 6월이었고, 첫 예산 보고에 따라 나머지 두 달 동안의 보고와 차기 사업 공모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방대한 양의 회계장부를,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은 채 반려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내가 ‘꼼꼼함’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팀장님은 평소에 9 to 6를 잘 준수하면서 ‘쿨내 진동’하는 모범을 보였다. 그렇지만 평소에 준비를 잘해서 중요한 시기를 적절히 마무리 짓는 법은 잘 모르건 사람이었다. 늘 유도리 있는 일처리를 원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그 결과는 항상 내가 다 떠맡았다. 어쨌든 근엄하게 “야근 명령”을 내리셨지만, 나는 이미 그전부터 착실히 쌓아온 지출결의서를 완성했기 때문에 대체 야근을 해서까지 처리할 일이란 무엇일까 하고 욱하는 마음이 생겼다.
“언제 그렇게 열심히 했다고.”
나는 조그맣게 궁시렁거렸다. 그러면서 자꾸 시계만 들여다봤다.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분명 저녁 열 두시나 되어서야 끝날 텐데... 그럼 디디는 어떡하지? 가족들도 늦게까지 직장에 있었다. 가족들 중 내가 가장 일찍 끝나는 편이라, 퇴근 후 일상은 늘 디디와 산책을 하고 새 밥을 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11시에 퇴근을 하고 남편도 빨리 귀가해봐야 10시였다. 회사원이 된다는 것은 개인의 저녁시간을 모조리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내 개를 돌볼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삶이었다.
아차. 지난번 디디가 더워 죽을 뻔했던 사건이 떠올랐다. 또 무엇을 빼놓고 온 걸까 마음이 잔뜩 흔들렸다. 아니다. 이번에는 에어컨, 선풍기 모두 잘 설정해놓고 왔다. 출근 4시간 후부터 에어컨이 틀어지고, 선풍기는 아예 연속으로 돌아가게끔 만들었다.
모든 조건은 완벽했다. 그럼 그래야지. 그럼에도 불안감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뭘 잘못했지? 배변패드는 새 것으로 교체했고, 밥그릇도 잘 채워놓고, 물그릇은... 나이가 들면서 음수량이 부쩍 늘어났는데, 그 정도 양이면 괜찮으려나? 미처 밥그릇만큼의 양을 채우지 못한 물그릇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이번에는 연차고 뭐고 신청할 수가 없었다. 회사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고 내가 없으면 일이 돌아갈 수 없으니까. 나는 이 업무의 주요 담당자이니 책임을 회피하고 집으로 갈 수 없었다. 나는 잠시 마음속에서 디디를 밀어내려고 했다.
저녁 6시. 평소 같으면 활기차게 인사를 하고 나와야 하는 시간이었다. 야근을 한답시고 팀장님이 밥을 시키란다. 나는 아무거나 다 좋다고 했다. 이사님은 아예 나가서 먹자고 보챘다. 우리는 사무실 근처의 허름한 호프집으로 갔다.
7시. 주문이 밀린 탓에 우리 테이블에 음식이 늦게 차려졌다. 나는 원하지도 않는, 허튼 대화들 속에서 억지로 사회생활이 적응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으며 하하호호 웃었다. 나도 뭔가를 먹기는 먹었지만 금세 목구멍이 막혀버렸다. 아마 물을 마시지 못한 디디도 그러할 것이다.
8시. 사람들의 말이 길어졌다. 이사님은 아예 거래처 대표까지 불렀다. 몇 번, 맥주잔들이 서로 부딪혔다.
9시. 자리를 뜨고 싶어 엉덩이가 꿈틀댔다. 술을 못 마시는 나에게 이 자리가 지나치게 곤욕스러웠다. 재미도 없고 걱정만 늘어가는 술자리에서 넋을 잃는 듯했다.
10시. 이어서 11시. 사람들은 야근을 해봤자 이렇게 흥청망청 놀 테니 더 이상 야근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빌런 같은 팀장은 하나라도 끝내야 한다면서 먼저들 퇴근하라고 했다. 우리는 거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사무실로 들어왔다.
11시 15분. 취기가 올라와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팀장님이 퇴근한다고 가버렸다. 우리는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온전히 기쁘지는 않았다. 내 황갈색 털복숭이를 만나러 잽싸게 뛰어나왔다.
“빵빵!”
버스 정류장으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내 뒤통수에 누군가가 클락션을 울렸다. 남편이었다.
“디디는?”
남편은 야근한 아내를 데리러 가려고 일부러 차를 끌고 기다렸다.
“디디? 멀쩡하던데?”
“아니, 내가 물을 덜 줘서. 요즘 물 많이 마시잖아요.”
“괜찮아요. 디디는 오늘 하루 종일 잠만 자서 물 조금만 마셨어요.”
“믿어도 되는 거예요?”
“못 믿겠으면 직접 가서 보면 되잖아요.”
18살 노령견이 자기 처신을 한다면 뭘 얼마나 한다고! 물그릇이 비었을 텐데. 항상 6시에 퇴근했어도 그랬는데... 주차를 하고 올라가는 길이 천리길처럼 멀게 보였다.
“디디!”
디디의 이름을 불렀지만 디디는 곤히 잠들어 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몇 번 더 디디를 부르다 결국 흔들어 깨웠다. 디디는 게슴츠레 눈을 뜨며 다시 그때처럼 놀란 내 얼굴과 마주했다. 입맛을 짭짭 다시며 고개를 홱 돌리더니 눈을 감았다. 걱정하는 내 모습도 귀찮은 거다.
“괜찮은 거지? 멀쩡한 거지?”
눈 감은 디디를 흔들어 깨우고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디디가 인상을 쓰며 남편에게로 슬금슬금 가버렸다. 이번에는 물그릇을 살폈다. 물그릇은 약간 찰랑거릴 정도로, 아주 바닥이 보이지는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괜찮다니까. 너무 과잉보호야. 디디도 열여덟 살이야. 고등학교 2학년이 그것도 모르겠어?”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자 남편이 괜한 타박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그래, 디디도 어리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물을 주지 않으면 혼자서 해결할 수는 없으니까.
디디의 물그릇에 시원한 물을 붓고 살짝 따뜻한 물을 얹었다. 새끼손가락을 넣어 물의 온도를 간 봤다. 그릇을 자리에 두니 디디가 찹찹 소리를 내며 열심히 마셨다.
언니 올 때까지 참은 거니, 디디야?
디디가 정말 목마름을 참은 것인지, 아님 자느라고 귀찮아서 물을 덜 마신 것인지 아직까지 알 턱이 없다. 확실한 것은 디디가 18살이 되도록 여전히 내 손길을 바라야 하는 연약한 존재임에 틀림없고, 여의치 않은 순간마다 갈등하는 것이 참으로 괴롭다는 것이다.
디디를 위해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정말 디디를 위한 것인지 내 안에서 혼란이 일었다. 먹고사는 것과 개를 위해 헌신하는 것, 양쪽의 균형을 맞추며 살 수는 없을까? 고민이 깊어지면서 디디에게서 해답을 듣고 싶었다. 물그릇을 비워내는 디디를 보면서 직장생활이 오래가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