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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태연 Apr 23. 2020

연차를 썼다.

사유에 적었다. “개가 아픔”

  조직생활이라는 건, 누군가와 부대끼며 개인의 삶을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조직생활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언뜻 보기에는 나름대로 잘 적응하는 듯해 보여도 내면에서는 사회적 자아와 고유한 자아가 서로 갈등을 빚고 있다.



  어딘가에 매여있는 것은 디디의 사료값, 간식값, 더 나아가서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진료 및 수술비 등을 감당하기 위해서 억지로 참아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을 기억하며, 한편으로 디디의 늙음을 지켜보며, 나는 이 조직생활을 참곤 했다.




  “단우 씨, 이번 결산 처리는 어떻게 됐어?”




  상사가 업무적인 것을 물어볼 때마다 나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버벅거리면서 서류 뭉치를 들썩거리는 내 꼴이, 상사의 눈에 얼마나 한심스러웠을까. 재밌는 것은 나 같은 사람의 업무파트는 무려 ‘회계’였다. 사회생활의 시작을 ‘회계’로 시작하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7 더하기 8을 손가락셈으로 해봐야 답이 15임을 알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디디의 사료통이 바닥을 긁어가고 있던 날, 더 이상 낭만에 젖어서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 능력이 없었고, 스펙이나 뭐 그러한 것들도 없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개 한 마리의 인생을 책임지는 건, 그로 하여금 ‘뭐라도 해야 하는’ 의무감, 책임감, 뭐 그런 것들을 짊어지게 했다.



  디디의 등을 쓸어만지며 일자리 정보를 찾다가 무능함만 깨달았다. 그러다 우연히 ‘취업성공패키지’라는 것을 전해 들었다. 직업훈련학원에 등록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지원하고 출석률이 높으면 훈련수당도 준다고 했다. 그 길로 달려가 취업성공패키지에 등록했다. 몇 개의 회계, 세무 자격증을 취득했고 몇 주만에 어떤 비영리단체에 입사하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나를 채용한 이들은 답답한 부하직원을 다루어야 하는 곤경에 처했다. 자격증에 필요한 공부만 할 줄 알았지, 세무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회사도 스타트업인지라, 직원들을 이제 막 채용한 단계라서 사수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냥, 무작정, 알아서 해내야 했다. 누가 누구에게 물어보고 답할 재간이 없었다. 파트가 파트인지라 남들보다 야근을 더 많이 해야 했다.








  ‘100년 만의 가뭄, 찜통더위를 뛰어넘는 살인 더위.’




  그 해 여름을 장식할 말은 이런 것들이었다. 나도 더위에 지쳐갔지만 디디도 마찬가지였다. 디디는 반지하방에 살면서 아토피에 걸렸던 탓에 피부가 얇아졌다. 디디가 여름을 버티기 위해서는 얇은 피부에 더위가 영향을 덜 미치도록 해야 했다.



  출근할 때면 선풍기를 ‘아기 바람’ (미풍보다 더 가벼운 정도의 약한 바람)을 설정해두고 나갔다. 어제보다 더 더운 날이다 싶으면 미풍을 틀고 회전을 시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풍기만으로는 부족하겠다 싶어, 아예 에어컨의 타이머를 설정해두기도 했다. 전기세가 40만 원이 나온 날은 내 월급의 1/3을 공과금으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에어컨을 틀어놓고, 선풍기를 맞추고 나왔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 날은 어제보다 더 무덥게 느껴졌다. 오전 10시, 출근 후 1시간이 지난 시각이었다. 이미 출근 버스에서부터 이마의 땀을 훔치고 들어와서 지금까지도 땀범벅이 된 얼굴을 닦는 중이었다. 자기 머리 위에 에어컨이 있어 춥다면서 에어컨을 꺼버리는, 남의 입장 따위는 배려하지 않는 상사 때문에 카톡으로 남편과 뒷담을 즐기고 있었다.




  "아 오늘 엄청 덥다.”


  "그러니까ㅠㅠ”


  "디디는 괜찮겠지?"


  "잘 있겠지 뭐.”


  "개육아 좀 신경 써~ 잘 있겠지가 뭐야.”


  "선풍기랑 에어컨 시간 맞춰놓고 나왔으니까 괜찮아.”




  짧은 대화들이 오가면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에어컨 켜고 온 거 맞나? 에어컨을 못 켰으면 선풍기라도 제대로 틀어놓고 왔나?'




  불안해진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마음을 온통 후벼놓았다. 팀장님은 머리가 아프다며 반차를 내고 귀가하셨다. 함께 남아있던 동료가 신나서 말을 걸었는데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나도 어디 아프냐며 물어보는데 대답할 수 없었다.



  개 때문에 연차를 쓰겠다는 건, 조직생활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개는 나의 가족이긴 하지만, 사회적인 범주 안에서 '가족'이란 '개'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개를 위해 연차를 사용한다는 건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초조함이 얼굴에 드러나서 일도,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


  "아, 저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으니까 말해봐 봐. 내가 다 들어줄게."


  "저... 사실은......"


  "뭔데?"


  "개가 아파요."


  "뭐?"


  "있잖아요, 주임님! 제가 사실은 매일 아침마다 에어컨이랑 선풍기를 틀어놓고 시간 예약을 하고 나온단 말이에요. 그런데 오늘은 그걸 못한 것 같아요. 켰는지 생각이 안 나요.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연차 좀 사용하겠습니다!”




  사무실은 고요해졌다. 아, 이 어색한 정적. 직장생활도 중요하지만 결국 디디를 위해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니까! 그래, 용기를 낸 건 잘한 행동이다. 여러 가지 말로 자신을 위로했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뻗어나갔지만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한 말, 적절한 대답 따위가 내뱉어지지 않았다.



  주임님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움찔거리며 한쪽 방향으로 움직였다. 다행히 그것은 비아냥의 웃음이 아니라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황당함의 웃음이었다.




  “아... 네... 쓰세요... 연차.”


  “정말요? 진짜 연차 써도 되나요?”


  “가족 일인데요 뭐. 대신에 팀장님도 확인하셔야 하니까 사유서만 적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주임님!”




  나는 신나서 사유서를 작성했다.




  연차 신청 사유 : 개가 아픔.




  주임님은 ‘개가 아픔’이라고 작성된 사유서를 보면서 박장대소를 했다. 그러면서 빨리 가보라고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 토닥거림에서 감사와 안도감을 느꼈다. 여러 번 고개 숙여 인사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버스에 올라 타니 빵빵하게 틀어진 에어컨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식은땀이 등 뒤로 또르르 흘렀다. 속에서는 불이 나고 있었다. ‘아저씨, 빨리요!’ 하는 무언의 외침으로 기사님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면에 발바닥이 닿기 무섭게 집까지 달렸다. 얼굴에서는 땀과 눈물과 콧물이 뒤엉켰다. 하필 묶지 않은 긴 머리가 볼살에 더덕더덕 달라붙었다. 맨손으로 얼굴을 닦으며 뛰었다. 동네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미친 여자처럼 디디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집 앞에 도착했다. 도어락 키를 누르는 손이 떨려서 한쪽 손으로 꼭 붙들면서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면서 훅훅한 열기가 머리칼을 훑었다. 나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디디가 누워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디디야!”




  지금쯤 열심히 사료값을 벌고 있어야 할 나의 목소리에 디디가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졸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디디의 벽면에서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까딱거리는 팬을 따라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만 한 귀퉁이에 놓인 선풍기만 동작을 멈춘 채 가만히 있었다.



  디디를 껴안았다. 다행이야, 다행이야. 몇 번을 다행이라고 울어재끼면서 디디를 쓰다듬었다. 디디는 어리둥절하며 내 품이 답답하다고 고개를 돌렸다. 디디의 볼에, 앞 발에, 등허리에, 온몸에 감사함의 뽀뽀를 해주었다.




  ‘주임님, 감사합니다! 주임님 덕분에 저희 강아지가 무사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연차를 허락해주고 사정을 이해해준 주임님이 고마웠다. 내 개를 가족이라고 부르기에 수많은 고민들을 하고, 말을 정제해서 뱉어도 될까 말까 한 연차 사용이 처음으로 용납되었다. 조직생활에서 ‘개가 아픔’이라는 말이 사유서에 쓰여있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일까?








  다음 날, “개는 좀 어때요?” 하는 주임님의 질문에 “감사합니다! 주임님은 제 개의 생명의 은인이에요!”라고 하며 감사의 초콜릿을 건넸다. “뭘 이런 걸 다” 하고 머쓱해하는 주임님의 마음이 예쁘고 고마웠다. 연차 사유서를 본 팀장님은 별 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 개가 아프지 않도록 허락해준 모든 사람들, 상황들에게 뭉클함이 올라왔다.



  그 후로는 같은 사유로 연차를 사용하지 못했다. 빠짐없이 챙길 것을 다 챙기고 출근을 했다. 그렇지만 종종 그때 생각이 나곤 한다. 언젠가 다시 한번 ‘개가 아픔’을 이유로 연차를 쓸 수 있을까? 이렇게 넉넉한 배려를 받을 수 있을까? 먼 훗날 사유서에 ‘개가 아픔’을 쓸 수 있는 날이 또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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