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령견 아이는 홀로 집에 있어야 했다. 그래도 출근을 해야 했다.
모든 생명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려 애쓴다. 죽음을 환영하는 생명은 없다. 그런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생에 대한 희망을 놓아버린 것이다.
나는 내 직업을 후회했다. 죽음을 조금 더 멀리할 수 있는, 그만큼 생을 늘릴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직업을 택했어야 했다. 수술용 메스가 아닌 펜을 잡은 것을 후회했다. 내 손은 오로지 글을 쓰거나 기도하는 일 밖에 몰랐다.
디디가 아팠다. 한쪽 눈이 벌겋게 부어올랐고 눈을 깜빡이는 것도 괴로워했다. 나는 아이에게 조금만 참으라는 잔인한 말을 했다. 별 볼 일 없는 글만 쓰며 시간을 낭비하는 작가는 먹고살기 위한 일을 해야 했다. 출근길 버스에서 나의 무능함을 곱씹으며 영혼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재능 없는 작가로서 생계를 이어야 하기에, 아이가 아프면 당장 들어가야 할 병원비를 벌어야 하기에, 아이가 배고프지 않도록 사료와 간식을 사야 하기에 돈을 벌어야 했다. 아이를 위해 돈을 벌면서도 아이가 아플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퇴근 후, 진이 빠져 바닥에 누워버린 내 옆에 가만히 디디가 앉았다. 시간은 이미 저녁 9시가 되어 동물병원이 문을 닫았다.
“미안해. 주말까지만 참아줄 수 있어?”
디디는 고개를 돌렸다. 한쪽 앞발로 눈을 비벼댔다.
“그만해.”
“너무 아파.”
“그러면 더 아파.”
“간지럽고 아파 죽겠어.”
“아프게 해서 미안해…”
욕심이라고 해도 좋으니 이 아이가 조금만 덜 아팠으면 하고 기도했다. 만약 내가 아프면 까짓것 눈치 좀 보더라도 병가나 연차를 내면 그만이지만, 반려동물의 문제는 좀 더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아이의 나이가 얼마나 들었는지, 내가 가족으로 얼마를 살아왔는지 등등 구차한 변명을 해야 한다. ‘집에 아픈 개가 있어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사회에서 개가 아프다는 것은 일종의 해프닝 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였을까? ‘우리 애만 괜찮으면 돼.’라고 생각해 온 이기적인 보호자였는데, 출근 길마다 혹은 퇴근 길마다 늙고 아픈 생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기적인 보호자이지만 그렇다고 나쁜 편은 아니었다. 동물보호단체에 기부를 하거나 종종 길냥이들의 밥을 챙겨주기도 했으니까. 그럼에도 디디가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 들었던 어떠한 애틋함이라든지, 다정함 따위는 없었다. 그들은 내 개와 고양이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내 직업을 버리고 모든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고 싶었다. 모두가 다 디디로 느껴졌다. 그들의 연약함이 내 안에서 유의미해진 순간, ‘누구에게 속한 동물’이라는 타이틀이 더 이상 무의미해졌다.
주머니 사정이 될 때면 간식을 몇 개 가지고 다니다가 고양이들이 잘 지나다니는 통로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부엌 창 틈으로 보이는 우리 집과 앞집 사이의 틈에 스티로폼과 박스로 둘러싼 작은 집을 만들어 두기도 했다. 이따금 눈을 마주치는 녀석들에게는 “아프지 마!”하고 말을 거는 여유도 생겼다.
늙고 아픈 생명. 그 연약한 존재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일까? 직장을 정리하고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는 것? 아니면 고통을 유예해달라고 부탁하고 꿋꿋하게 출근하는 것? 나의 한계가 서럽게 느껴졌다. 무능한 주인. 나는 디디의 볼을 매만지다가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오늘따라 출근길이 평소보다 더 고독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