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부서에 발령받은 지 어언 1년 10개월.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2년쯤 보고 듣다 보니 직접 얘기하지는 못하더라도 대화의 내용을 대부분 알아듣는 수준이 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귀찮아하는 안전관리 업무를 맡은 덕에 이곳의 장비와 내가 알지 못했던 안전 수칙을 많이 알게 되었다. 마음이 편안해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곳을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연초부터 나를 괴롭혀 온 업무 하나가 있었다. Level 4 자율주행차가 사고나 고장으로 돌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안전지대로 견인하는 시나리오를 짜는 일이다. 가르쳐주는 이 하나 없이 덩그러니 나의 업무로 남게 된 시나리오 수립. 이 일 때문에 참으로 많은 날을 고통받았다.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4개월이 넘는 팀장의 부재로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하고 있다.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조금 더 빨리 이 일을 익히게 된데 크게 한몫한 것 같다. 그 누구도 책임져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기한에 맞춰 끝내기 위해 뭐든 해야 한다. 이번 시나리오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몇 달을 끌고 끌어 드디어 마무리해야만 되는 11월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자료를 찾고 논문을 뒤졌다. 사업계획서도 결과보고서도 다시 한번 열어보고 찬찬히 찾아나다 보니 내가 원하는 자료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드디어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았던 돌파구가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아 그때부터 신나게 그림을 그리고 상황을 꾸며보았다. 그럴듯해 보이는 시나리오 3편을 만들어 외부인에게 여기저기 자문받기 시작했다.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찾아주었고 그 조언을 바탕으로 수정한 자료를 가지고 전문가 자문위원회에서 발표했다. 상황을 매끄럽게 설명하지도 못했고 대단한 대응 전락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만들었던 상황과 해결책이었기에 큰 문제 없이 설명할 수 있었다. 많은 문제점과 부족한 상황을 지적받았지만, 주눅들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마무리했다는 뿌듯함이 나를 보호해 주고 있었기에. 크나큰 숙제라고 생각했던 시나리오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처음 막막했던 상황과는 달리 어떤 상황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작은 자신감이 생겼다. 모든 일은 이렇게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것이다. 조금 더 깊이 있게 많이 공부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면 할수록 재미는 없고 더 잘할 때까지 공부하고 싶지 않은 게 문제의 상황. 나는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러야 할까. 내가 원하는 게 리더라면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에 머무르면서 더욱더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제나 용의 꼬리에 머무르면서 남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나는 이런 사람이란 걸 표현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런 의미의 리더가 되고 싶다. 지금처럼 온갖 눈치 다 보며, 못하면 어떡하냐는 고민은 접어둔 채 재미있는 일을 즐기면서 말이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일이 얼마나 있을까. 현실은 언제나 냉혹하다. 언젠가는 상황을 이끄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오늘도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즐거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