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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네니 Dec 04. 2023

내 인생의 안식년

지금 몸담고 있는 회사에 입사한 지 올해로 10년이 되었다. 2013년 11월 6일에 입사했으니 10년 하고도 한 달이 지났다. 우리 회사는 입사 10년 차에 특별휴가 5일을 제공한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남편이 육아 휴직으로 1년 쉬어가고 있는 데다가 나에겐 공짜 휴가 5개가 생겼으니 우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즐겁게 휴식하기로 결심했다. 대학 교수님들처럼 안식년이 되었다고 1년의 휴식시간을 주는 것도 아니고 고작 5일의 휴가가 더 생겼을 뿐인데 뭔가 한없이 놀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만 우리.


돈은 없고 시간이 있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 그야말로 여행하기에 적기란 생각이 든다. 과거에도 그래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시간이 있을 때는 항상 여행을 해 왔다. 언제나 나를 위한 여행을 해 왔다면 올해는 가족을 위한, 특히나 아이들을 위한 여행을 해 보기로 한다. 그렇게 우리는 휴양지로 향했다. 저렴한 항공사에 럭셔리한 리조트를 선택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너무나 설레는 마음에 그 누구도 쉽사리 잠들지 못해 원래 계획했던 시간보다 이른 밤 11시 즈음 인천공항을 향해 떠났다. 모두가 골아떨어지고 남편만 열심히 운전하여 새벽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피로함에 깨어나지 않는 아이들을 푹 재우고 7시쯤 일어나 설레는 여행이 시작되는 문으로 향했다.


우리의 여행 원칙은 매우 단순했다. 들 수 있는 만큼의 짐만 들 것. 아이들이 걸을 수 있는 만큼의 거리만 걸을 것. 많은 것을 보겠다는 욕심은 버리고 물놀이에 매진할 것. 혹시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방에 머무르기만 해도 아쉬워하지 않을 것. 여행의 목적을 ‘쉼’에 맞추고 그 이외의 것은 욕심내지 않을 것. 모든 스케줄은 아이들에게 맞출 것.


나는 꾀나 여행을 많이 한 편에 속한다.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걷고 뭐라도 더 사기 위해 눈을 부라리고 맛있는 걸 먹기 위해 맛집을 찾는 여행은 수없이 많이 해 보았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진정한 휴식을 위한 쉼이 있는 여행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언제나 당장에 많지 않은 큰돈을 들여 어렵사리 간 여행지였기에 뭐라도 더 많이 보고 듣고 배우기 위한 여행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학교를 졸업하고 쉼 없이 일하고, 결혼 후에는 아이 키우며 열심히 달려온 내게 진정한 휴식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돈이 들더라도 편안한 여행을 선택했다. 리조트에 머물면서 마음 편히 3식을 해결하고, 물놀이와 휴식 외엔 별다른 스케줄이 없는 아주 넉넉한 일정의 여행이었다.


안타깝게도 남편은 여행지에서 감기 몸살을 앓았다. 해외에 나가면 언제나 아프다는 남편이었다. 위가 약한 남편은 3식을 밥이 아닌 다른 음식으로 대체하느라 여로모로 탈이 난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하루 온종일 나 혼자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했다. 하지만 수영은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장르의 운동이 아닌가. 아이들의 시선에서, 그리고 내가 힘들지 않은 범위에서 무한대로 미끄럼틀을 타고 물놀이를 즐겼다. 체력적으로 조금 힘들 뿐 정신이 힘들지 않았다. 나 또한 동심으로 돌아가 무한대로 수영을 즐기는 하루하루였다. 아이들이 즐거우니 나 또한 즐겁고, 힘든 일이 없으니 짜증 낼 일이 없었다. 밥을 하는 일도 청소를 할 일도 없이 제공되는 식사를 즐기며, 맥주 한잔 마셔가며 물속을 들락날락거렸다. 하루종일 진하게 놀고 난 날이면 다음날 몇 시간 정도는 숙소에서 쉬어갔고, 에너지가 다시 차오르면 어김없이 물놀이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머물렀던 pic는 리조트 내부에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이다. 저녁엔 서커스를 즐기고 낮엔 수영을, 마지막날엔 수영장이 문 닫는 8시까지 물놀이를 하고 미끄럼틀을 탔다. 간간히 소낙비가 내리고 흐린 날이 이어졌지만 추워서 이가 닥닥 떨릴 정도의 날씨가 아니었기에 잠시 쉬었다 다시 뛰어들어도 전혀 문제 되는 날씨가 아니었다. 거기다 우리나라처럼 뭔가 하나 하는데 줄을 많이 서거나 끊임없는 눈치 싸움을 해야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많은 것이 너그럽고 오늘 아니면 내일 하면 되지라는 긍정의 마인드로 휴식에 임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뭘 했냐고 묻는다면 오직 물놀이만 기억날 뿐이다. 먹고 자고 물놀이했던 하루하루. 그 외에 특별히 투어를 가거나 맛집을 찾는 일도 없었다. 아이들이 어려 무언가 많이 하기 위해 찾아다니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될 것임이 불 보듯 뻔했기에 우리는 많은 것을 계획하지 않았고 그 선택이 옳았음을 몇 달이 지난 지금도 확신할 수 있다. 작은 아이는 지금도 하루 종일 물놀이 할 수 있는 외국에 다시 가고 싶다고 얘기한다. 그만큼 다섯 살 아이의 기억 속에도 질릴 만큼 실컷 했던 물놀이의 기억이 강렬했나 보다. 상황에 맞는 여행을 준비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여행을 신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임을 이번 가족 여행을 통해 또다시 깨닫는다.


현 직장에서의 10년 차 안식년, 남편에게는 육아휴직을 빌린 1년 동안의 쉼을, 큰 아이에게는 초등학교라는 새로운 생활의 시작과 동시에 자립심을, 작은 아이는 유치원 생활을 시작으로 껌딱지 생활의 독립을 선사했고, 나에겐 가사 지옥에서 벗어나 그저 회사생활만 잘 적응하면 되는 한 해였다. 덕분에 그토록 힘겨웠던 자동차 부서에서의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마음의 여유가 제법 생겼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될 대로 되라는 욕심 없는 마음가짐에서 시작되었음을. 인생에 있어 또다시 쉼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2023년의 많은 시간을 떠올리면서 지금처럼 너그럽게 지낼 수 있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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