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하다. 지루하다. 너무 조용하다. 우린 이럴 때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왜 고요함을 견디지 못하는가: 내 안의 침묵 공포증
우리는 모두 평화와 휴식을 갈망한다. 소음과 자극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잠시라도 모든 것을 멈추고 조용히 쉬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막상 완벽한 침묵의 순간이 주어지면, 우리는 역설적으로 안절부절못하며 그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명상을 위해 눈을 감으면, 평화 대신 불안과 지루함이 우리를 덮친다.
도대체 왜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되었을까? 이 글은 ‘고요함’이라는 거울 앞에 선 우리 내면이 어떻게 반응하고, 왜 그토록 침묵을 두려워하는지에 대한 깊은 탐구의 기록이다.
경보 시스템의 패닉: 자극이 사라졌을 때 우리 몸에서 벌어지는 일
우리가 고요함 속에 머무를 때, 가장 먼저 패닉에 빠지는 것은 우리 뇌의 가장 오래된 부분, 바로 ‘편도체’이다. 그의 유일한 임무는 외부의 신호를 감지하여 위험을 판단하는 것이다. 수십만 년 동안, 그는 ‘신호의 존재’ 속에서 파수꾼으로서 일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자극이 사라진다면? 그에게 ‘신호 없음’은 ‘안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적의 매복’ 혹은 ‘존재의 소멸’과 같은, 가장 극단적인 위험 신호로 해석된다. 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이것은 분명 더 큰 위험이 숨어있다는 뜻이다!”라고 외치며, 온몸에 최고 수준의 ‘거짓 경보’를 발령한다.
이 경보가 울리면, 우리 몸은 생존을 위해 어떻게든 ‘없어진 자극’을 다시 만들어내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시작한다.
비어있는 스크린 채우기: 뇌의 4단계 자극 생성 노력
고요함이라는 텅 빈 스크린을 견디지 못한 우리의 뇌는, 어떻게든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자체적으로 콘텐츠를 생성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보통 4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1단계 노력, ‘상상’: 가장 먼저, 뇌는 ‘상상’이라는 이름의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긍정적인 미래를 그리거나(공상), 과거의 좋았던 기억을 재생하며(회상) 텅 빈 현재를 외면하려 한다.
2단계 노력, ‘걱정’: 상상이 별다른 효과가 없으면, 뇌는 더 강력한 자극인 ‘걱정’을 만들어낸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 미래에 대한 불안, 관계에 대한 염려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고요함의 불편함보다 ‘걱정’의 고통을 차라리 선택하게 만든다.
3단계 노력, ‘움직임’: 정신적인 자극만으로 부족할 때, 뇌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좀이 쑤시고, 몸을 배배 꼬게 만들며, 손가락을 까딱거리거나 다리를 떨게 만든다. 이는 어떻게든 물리적인 감각을 만들어내려는, 도파민 시스템의 ‘자극 결핍 신호’이기도 하다.
4단계 노력, ‘자극 찾아 나서기’: 이 모든 내부적인 노력이 실패하면, 우리는 마침내 항복을 선언하고 외부에서 자극을 찾아 나선다. 명상을 중단하고 눈을 떠 스마트폰을 집어 들거나, TV를 켜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은 마침내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실존적 공포: 고요함은 ‘나의 존재’를 흐릿하게 만든다
편도체의 원시적인 공포 너머, 고요함이 우리에게 주는 더 깊은 두려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아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대부분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과 감정의 흐름’이다. 나의 기억, 나의 감정, 나의 계획, 나의 목소리. 이 내면의 이야기가 바로 ‘나’라는 존재의 증거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런데 진정한 고요 속에서는, 이 내면의 이야기가 점차 잦어든다. 생각의 흐름이 멈추고, 감정의 파도가 잠잠해진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나’라는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듯한 실존적 공포를 마주하게 된다. 끊임없이 흘러가던 이야기가 멈추면, ‘나’라는 존재감조차 흐릿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편도체가 느끼는 생존의 위협과는 다른, ‘자아’ 자체가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더 근원적인 공포다.
인식의 전환: 고요는 위협이 아닌, 본래의 집이다
이 모든 저항과 공포의 과정을 이해했다면, 우리는 비로소 인식의 전환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모든 과정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반응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고요함 앞에서 불안을 느끼는 나 자신을 책망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수십만 년간 나를 지켜온 충직한 파수꾼의 당연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파수꾼을, 마치 겁에 질린 아이를 대하듯,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가르쳐야 한다. “보아라. 고요함은 위협이 아니다. 이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상태다.” 라고. 우리는 매일의 명상 훈련을 통해, 이 사실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경험으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
고요함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흐릿해지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오히려 시끄러운 이야기의 감옥에서 벗어나 더 큰 존재와 합일하는 ‘해방’의 첫걸음일 수 있다. 고요는 내가 돌아가야 할 본래의 집이며, 모든 것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텅 빈 공간이다. 이 위대한 전환을 위해, 우리는 기꺼이 침묵의 불편함을 통과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