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초기 모델: 전전두엽과 편도체, 그리고 '나'
나의 명상 수련은 하나의 명확하고 합리적인 설계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나는 내 안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내면을 세 가지 주요 구성요소로 나누어 파악했다.
첫째는 뇌의 CEO이자 이성적 조절을 담당하는 ‘전전두엽’. 둘째는 생존을 위해 즉각적인 경보를 울리는 ‘편도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두 시스템의 상호작용을 의식적으로 관장하고 훈련시키는 주체인 ‘나(관찰자)’다.
이 모델 안에서 수련의 목표는 명확했다. ‘나’는 의식적인 훈련, 즉 ‘호흡’과 ‘알아차림’을 통해 전전두엽의 힘을 키운다. 전전두엽의 조절 능력이 강해지면, 편도체의 과잉 활성화는 자연스럽게 잦아든다. 그 결과, 충동과 거짓 경보, 과한 감정 기복이 완화되어 삶의 균형을 되찾게 된다.
이것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 보이는 논리였다. 나는 이 설계도를 믿었고, 이 길을 따라 나아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수련이 깊어질수록, 나는 이 완벽해 보이는 설계도에 예상치 못한 균열이 있음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의문: 이것은 훈련인가, 아니면 회피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완벽해 보이는 모델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그토록 ‘인지’와 ‘감각’에 집중하는 이 길에 안도감을 느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이유는 그것들이 차갑고, 분석적이며, 감정적으로 ‘어색할 일’이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전에 스스로 ‘자애(自愛)’가 결여되어 있으며, 상처 입은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 진짜 어색하다고 인정한 바 있다.
어쩌면 나는, 마침내 마주해야 할 가장 어렵고 불편한 숙제인 ‘스스로를 향한 자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인지’와 ‘감각 집중’이라는 아주 그럴듯하고 세련된 피난처를 새로 지은 것은 아닐까? 나의 수련이, 불편한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보듬는 대신, 그것들을 차갑게 분석하고 관조하는 ‘개념의 성’으로 도피하는, 또 다른 형태의 회피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것이 정말 전진인지, 혹은 더 정교해진 회귀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했다.
두 번째 의문: ‘관찰하는 나’는 누구인가?
의문은 꼬리를 물고, 마침내 내 수련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를 향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분석하고, 통제하려는 ‘나’라는 존재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내 안에 전전두엽, 편도체, 그리고 이 둘을 다스리는 ‘나’라는 삼위일체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구조 자체가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별도로 존재함으로써, 전전두엽과 편도체는 여전히 나의 온전한 일부가 아닌, 나에게 관찰당하고 통제당해야 할 ‘대상’으로 분리되어 버린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통합’이나 ‘평화’가 아니었다. 이것은 내 안의 두 세력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중재해야 하는, 영원한 ‘긴장’ 상태였다. 나는 이 아슬아슬한 긴장 상태를 ‘수련’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정당화하고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내면의 두 세력이 힘의 균형을 이루는 ‘정교하게 설계된 교착상태’를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정말로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내전을 영속시키기 위한 새로운 독재자, 즉 ‘관찰자라는 이름의 나’를 세운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회의에 빠졌다.
새로운 이해: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과복용’에 대한 처방이다
이 길고 긴 자기 성찰과 논리적 투쟁의 끝에서, 나는 새로운 관점에 도달했다. 나의 초기 모델이 틀렸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현상의 절반만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의 목표는 편도체나 도파민 시스템을 ‘악’이자 ‘병’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박멸하려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그것들을 ‘과복용된 약’으로 이해한다.
편도체 시스템은 본래 나를 위험으로부터 지키려는 긍정적인 의도를 가진 본능이다. 마치 아세트아미노펜(타이레놀의 주성분)처럼, 적정량을 사용하면 고통을 줄여주는 이로운 약이다. 하지만 지금 나의 상태는, 이 약이 ‘과복용’되고 있는 것과 같다. 낡은 생존 본능이 현대 사회의 온갖 스트레스에 과잉 반응하며, 오히려 내 삶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간에 무리를 주는 독처럼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하는 수련은 이 시스템들을 적으로 규정하여 파괴하려는 내전이 아니다. 이것은 ‘과복용’을 멈추고, 다시 ‘적정량’을 회복하여, 내 안의 무너진 ‘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지극히 합리적인 ‘처방’이자 ‘해독’ 과정이다. 이것은 교착상태가 아니라, 조율의 과정이다.
결론: 무너진 균형을 감지하는 것, 그것이 수련이다
이 모든 논쟁과 자기반박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내가 가진 모든 ‘전전두엽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나의 논리를 더욱 단단하고 정교하게 만들기 위한, 나 스스로가 설계한 자기 검증의 과정이었다.
결론은 명확해졌다. 나의 명상은 ‘나’라는 통제관이 두 시스템을 감시하는 긴장 상태가 아니다. 편도체 또한 나를 지키려는 선한 본능이며, 나의 수련은 이 본능을 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과잉 활성화된 기능을 정상으로 되돌려 내면의 ‘균형’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내가 ‘교착상태’라고 비판했던 그 지점은, 사실 ‘무너진 균형을 감지하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의지가 작동하기 시작한’ 첫 순간이었다. 이 치열한 자기 검증의 과정을 통해, 나의 길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만큼 명료해지고 단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