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의 시선

by 김종환

드라마 밖으로 걸어 나온 시청자: '관찰자'의 발견


생각의 홍수와 지루함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나는 ‘흩뿌려두고 돌아오기’라는 첫 번째 생존 기술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파도가 치는 것을 그저 바라보는 것을 넘어, 파도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에 흔들리지 않는 더 근본적인 힘이 필요했다.


그 힘은, ‘관찰자’의 발견과 함께 시작되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나’라는 이름의 드라마 속 주인공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내 삶에서 벌어지는 기쁨, 슬픔, 분노, 성공과 실패의 모든 사건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감정이 요동칠 때마다 함께 절규하고, 작은 칭찬에 우쭐해하며, 비난의 말 한마디에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우리는 드라마 속 주인공과 자신을 너무나 완벽하게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다. 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인 동시에, 그 드라마가 상영되는 TV 밖, 편안한 소파에 앉아 모든 것을 지켜보는 ‘시청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이 바로 ‘관찰자’의 발견이다.


TV 화면 속 주인공은 울고 웃으며 온갖 고초를 겪지만, 화면 밖의 시청자는 그저 그 모든 것을 지켜볼 뿐이다. 그는 주인공의 슬픔에 공감할 수는 있어도, 그 슬픔 때문에 실제로 상처 입지는 않는다.


그는 이것이 잠시 상영되는 ‘이야기’일 뿐, 자신의 존재 자체가 아님을 알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시청자는 화면의 밝기를 조절할 수도, 소리를 줄일 수도, 심지어는 TV를 꺼버릴 수도 있는 ‘선택권’을 가진 존재라는 점이다.


과거의 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과 나를 분리하지 못해 모든 고통을 직접 겪어내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관찰자’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내 삶이라는 드라마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고통받는 나와, 그 고통을 지켜보는 나를 분리하는 것. 이것이 앞으로 이야기할 모든 내면 관찰 기술의 가장 위대한 전제 조건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3초: '틈'을 만드는 기술


드라마 밖으로 걸어 나온 시청자, 즉 ‘관찰자’의 시선을 확보했다면,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그 관찰자가 편안히 머물며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나는 이 공간을 ‘틈’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일상적인 반응은 ‘자극 → 즉각적인 행동’이라는 자동화된 회로로 이루어져 있다. 불쾌한 말을 들으면(자극) 화를 내고(반응), 지루함을 느끼면(자극) 스마트폰을 집어 든다(반응). 이 과정은 너무나 빠르고 자동적이어서, 우리에게는 어떠한 선택권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틈’은 바로 이 자극과 반응의 사슬을 끊어내는 의식적인 멈춤이다. 이 틈이라는 공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동 항해 모드를 끄고,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게 된다.


그렇다면 이 결정적인 틈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가장 즉각적이고 강력한 도구는 바로 ‘호흡’이다.


나는 특히 충동이 순식간에 나를 덮치기 전, 그 미세한 ‘전조증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달았다.


진짜 싸움은 충동의 한복판이 아니라, "엄청 심심하다"는 느낌이 들 때, 가만히 있는 것이 비생산적이라는 '조급함'이 들 때, 무언가 짜릿한 것으로 공허함을 채우고 싶은 '갈증'이 일어날 때 이미 시작된다.


나는 이 전조를 감지하는 즉시, 모든 것을 멈추고 ‘3초의 틈’을 만드는 훈련을 시작했다.


1단계 (멈춤과 호흡): 하던 모든 것을 즉시 멈춘다. 그리고 눈을 감고, 가장 깊은 호흡을 단 세 번만 의식적으로 행한다.


2단계 (이름 붙이기): 마음속으로 방금 감지한 전조의 이름을 명확히 불러준다. “아, 심심함이 왔구나.” 혹은 “짜릿함을 원하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3단계 (몸 감각 찾기): 그 감각이 지금 내 몸의 어디에서 느껴지는지 찾아본다. 가슴이 답답한가? 손끝이 근질거리는가? 배가 서늘한가? 그저 느껴볼 뿐이다.


이 간단하고 짧은 3초의 멈춤이, 반사적인 행동의 고리를 끊는 가장 강력한 첫걸음이다. 이 틈 안에서, 관찰자는 비로소 다음 행동을 준비할 시간을 벌게 된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감정에 '이름표'를 붙이는 지혜


‘틈’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확보했다면, 이제 그 안에서 관찰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첫 번째 임무는 ‘지혜의 칼’을 사용하는 것이다. 즉,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그것과 나를 명확히 분리하는 작업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감정에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나는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대신, 한 걸음 떨어져 “아, 지금 ‘불안’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내 안을 지나가고 있구나”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이 단순한 행위는 감정을 ‘나 자신’이라는 주관적인 상태에서, 관찰 가능한 ‘하나의 현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감정과 나 사이에 안전한 거리가 확보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나는 이 감정들이 대부분 과거로부터 온 ‘메아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겪었던 어떤 사건이 지금의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은 이미 끝났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한 ‘기억’과, 그 기억에 달라붙어 있는 ‘감정의 메아리’일 뿐이다.


이 메아리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나는 감정의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그것이 몸에 일으키는 순수한 ‘감각’에 집중했다. ‘불안’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뒤, ‘그래서 지금 내 몸은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관찰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조여오며, 배가 서늘해지는 감각. 이야기는 과거에 속하지만, 몸의 감각은 언제나 현재에 있다. 나는 감각을 느낌으로써, 나를 과거에 묶어두려는 감정의 이야기로부터 벗어나 현재에 닻을 내릴 수 있었다.


이 모든 분리와 관찰의 과정 끝에, 나는 가장 중요한 선언에 도달했다.


“이 고통스러운 감정들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만, 이것은 진짜 내가 아니다.”



차가운 외과의사: 왜 나에게 '자애'가 필요했나


감정을 분리하고 관찰하는 ‘지혜’의 칼은 강력했다. 하지만 나는 곧 이 지혜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혜만 있고 ‘자비’가 없다면, 우리는 상처 입은 자신을 대하는 냉철한 외과의사와 같아지기 때문이다.


외과의사는 정확하게 진단하고 군더더기 없이 환부를 도려낸다. “이것은 좌절감이라는 종양이다. 이것은 불안이라는 염증이다.” 그의 판단은 정확하고 수술은 효율적이지만, 그의 손길은 차갑다. 수술을 받는 ‘나’는,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취급받는다고 느끼며, 이 과정 자체가 또 다른 형태의 자기 비판과 저항이 될 수 있었다.


나는 내 명상에 바로 이 ‘자애(自愛)’, 즉 스스로를 향한 자비가 결여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진정한 치유는, 상처 입은 아이를 돌보는 따뜻한 어머니의 마음과 같아야 했다. 어머니 또한 아이의 상처를 명확히 본다(지혜). 하지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놀란 아이를 따스하게 안아주며 “괜찮다, 많이 아팠지” 하고 속삭여주는 것이다(자비). 그 따스한 품 안에서 안전함을 느낄 때, 아이는 비로소 울음을 그치고 상처를 내어 보인다.


스스로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첫째, 저항을 녹인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하는 내면의 싸움을 멈추게 한다. 스스로의 편이 되어줄 때, 감정은 더 이상 방어적으로 몸집을 키울 필요가 없어진다.


둘째, 치유를 가능하게 한다: 상처는 안전하다고 느낄 때 아물기 시작한다. 자비는 ‘이 감정을 느껴도 괜찮다’는 허락이자, ‘상처받은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셋째, 통합으로 이끈다: 관찰하는 나와 고통받는 나를 다시 하나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스스로에게 "괜찮아"라고 말을 건네는 것은 지독히 어색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현실적인 방법부터 시작했다.


말 대신 몸으로 시작하기: 고통이 느껴질 때, 그저 가만히 손을 가슴 위에 얹어보는 것이다. 그 따스한 온기가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무언의 위로를 전하도록 허락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기: "괜찮아"라는 말이 거짓처럼 느껴질 때는, 그저 "아, 지금 마음이 정말 힘든 상태구나"와 같이, 판단 없는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해주는 것부터 시작했다.


지혜가 우리를 고통의 내용에서 분리시킨다면, 자비는 그 고통을 겪는 존재 자체를 따스하게 품어주는 치유의 과정이었다.



지혜의 칼과 자비의 품: 나의 선언문


지혜의 칼로 나와 감정을 분리하고, 자비의 품으로 그 고통받는 경험마저 끌어안는 것. 이 두 가지가 통합될 때, 나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담아내기’를 실천할 수 있었다. 그것은 도망가지 않는 용기, 부정하지 않는 지혜, 저항하지 않는 내려놓음이 하나가 된 상태였다.


이 통합의 과정에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몇 개의 선언문을 만들었다. 그것은 감정의 폭풍우가 몰아칠 때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닻이었다.


나의 첫 번째 선언문은 ‘지혜’에 기반한다.



“그래, 위축됨아, 자신없음아, 의기소침함아, 공포심아, 좌절감아, 나를 집어삼켜 잘근잘근 씹고 짓뭉개고 짓밟아라.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선언은, 어떤 경험도 진짜 ‘나’를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을 꿰뚫어 본 자의 용기다. 짓밟힐 수 있는 것은 나의 ‘경험’일 뿐, 그 모든 것을 상처 없이 비추는 거울과 같은 ‘나 자신’은 아님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련이 깊어지며, 나는 이 차가운 지혜에 ‘자비’라는 온기를 더한 두 번째 선언문에 도달했다.



“기세가 꺾인 그 느낌아. 좌절감과 망연자실함아. 더는 기회가 없을 것 같은 두려움아. 관계가 위태롭다고 느끼는 불안감아. 실수를 반복했다는데서 오는 허탈함아. 또 같은 실수를 해서 발전이 없다고 느끼는 마음아. 죄책감아. 후회야. 너희들이 있어 참으로 고통스럽구나. 그러나 내 안에서 마음껏 소용돌이쳐라. 기둥을 부수고 벽을 허물며 지붕도 날려버리고 내가 세운 가치관이며 결심이며 의지며 하나도 남김없이 쑥대밭으로 만들어라. 그저 너희들이 가진 그 폭력성과 파괴본능을 가지고 그저 마음대로 해라. 내 안에서 너희가 진짜 초토화시킨 것이 무엇이 되었는 지는 몰라도, 고통받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다. 나는 그저 그 모든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안타깝게 여기며"였다. 이것은 더 이상 차가운 분리가 아니라 따뜻한 포용이다. ‘고통받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다’라는 명료한 지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받는 나를 향한 깊은 사랑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진정한 강함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고통이든 온전히 느끼면서도, 그 고통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드넓은 하늘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마음을 확인하는 것


나는 명상 수련의 핵심 설계도를 완성하며, 이 모든 기술과 원리가 단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명상에 대한 가장 큰 오해를 바로잡는 말이기도 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명상을 ‘마음을 비우는 행위’라고 오해해왔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빗자루로 쓸어내려는 헛된 노력과 같았다. 구름을 쓸어내려는 그 노력 자체가 또 다른 구름, 즉 또 다른 생각을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행의 본질은 구름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름 뒤에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텅 비고 광활한 ‘하늘’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뿐이었다.


이것을 시끄러운 손님들로 가득 찬 ‘방’에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손님은 노래하고, 어떤 손님은 싸우고, 어떤 손님은 울고 있다. 이들이 바로 나의 생각과 감정, 즉 ‘소란스러운 마음’이다. 과거의 나는 이 손님들을 모두 밖으로 내쫓으려 애썼다(마음을 비우려는 노력).


하지만 진짜 수행은, 그 시끄러운 손님들에게서 잠시 눈을 돌려, 그 모든 소란을 품고 있는 ‘방’ 그 자체의 고요한 공간감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손님들이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도, 방의 벽과 바닥과 천장은 그 소음으로 인해 더러워지거나 좁아지지 않는다. 방의 본성은 ‘비어있음(공간)’이며, 그 비어있음이 있기에 모든 손님들이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소란스러운 손님이 아니다. 우리는 그 모든 손님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고요하고 드넓은 ‘집’ 그 자체다.


따라서 명상의 목표는 ‘마음을 비운 상태’를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의 본성이 원래부터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텅 빈 공간’이었음을 더 자주, 더 깊이 확인하고 그 안에서 편히 쉬는 것. 그것이 내가 발견한 모든 수련의 목적지이자, 모든 자유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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