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감'이라는 것은 우리를 '악의 굴레'로 몰아넣는 적인가
명상은 우리를 금욕주의로 이끄는가: 쾌락이라는 돛을 다루는 법
명상 수련이 깊어질수록, 내 삶에는 역설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충동의 수준은 눈에 띄게 감소했고, 시끄러운 자극으로 가득했던 세상보다는 고요한 환경이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삶에 대한 거창한 기대치가 낮아지면서, 일상의 작은 것들에서 잔잔한 만족을 느끼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 긍정적인 변화의 이면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이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는 결국 모든 쾌락과 즐거움을 멀리하고, 맛도 색도 없는 삶을 사는 금욕주의자가 되려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은, 명상과 쾌락의 관계에 대한 나의 가장 깊은 고찰이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도달한, 명상은 우리를 금욕주의가 아닌, 오히려 ‘쾌락의 현명한 주인’으로 만든다는 희망적인 결론에 대한 이야기다.
벗어날 수 없는 ‘쾌감’이라는 굴레?
우리는 과연 쾌감이라는 동력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일까? 아무리 명상을 하고 내면의 평화를 이야기한들, 결국 우리의 모든 행동은 더 많은 쾌락을 얻고 더 큰 고통을 피하려는, 기본적인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명상을 통해 쾌감에 초연해지려는 노력이야말로 가장 정교한 형태의 자기기만은 아닐까?
이것은 수행의 길에서 마주하는 가장 정직한 딜레마다. 쾌감이라는 강력한 바람 앞에서, 우리의 의지는 과연 얼마나 힘을 쓸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쾌감에 대한 오랜 오해부터 풀어야 한다.
쾌감은 죄악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쾌감’을 ‘죄악’과 동일시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어딘가 저급하고, 고통을 인내하는 것은 숭고하다는 이분법적인 가치관이다. 하지만 이것은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큰 오해다.
쾌감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닌, 지극히 중립적인 생명의 에너지다. 그것은 삶이라는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바람과 같다. 만약 우리가 쾌감을 죄악시하여 모든 돛을 찢어버린다면, 우리의 배는 망망대해 위에서 동력을 잃고 멈춰 서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오직 ‘의지력’이라는 힘겨운 노에만 의지하여 고통스럽게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문제는 돛이 아니라, 그 돛을 다루는 선원의 기술에 있다.
쾌감이라는 이름의 돛, 자애라는 이름의 키
여기서 ‘돛단배’라는 비유는 명상과 쾌락의 관계를 아주 명확하게 설명해준다.
돛: 쾌감, 즉 도파민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즐거움과 동기 부여는 우리 삶이라는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추진력’이다. 이 돛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무기력과 정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바람(자극): 외부의 유혹과 내면의 충동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이 멋대로 부는 ‘바람’과 같다.
키(의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작은 ‘방향타’가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진정 살고 싶은 삶’을 향한 우리의 의지, 즉 ‘자애’라는 이름의 현명한 왕(전전두엽)이다.
과거의 나는, 방향키가 고장 난 채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돛에 이끌려 표류하는 선원이었다. 그것이 바로 ‘쾌락 중심의 삶’이자 ‘집착’이다.
이제 나의 항해는 ‘바람(쾌감)’이 중심이 아니라, 내가 가고자 하는 ‘항구(진정 살고 싶은 삶)’가 중심이다. 나는 이제 바람을 이용할 뿐, 바람의 노예가 아니다. 때로는 역풍을 지그재그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혜도 발휘할 것이고, 때로는 순풍을 타고 유유히 나아가기도 할 것이다. 모든 움직임은 오직 내가 정한 ‘항구’를 향한다.
좋은 쾌감과 나쁜 쾌감: 쾌락의 질을 분별하는 지혜
현명한 항해사가 된 우리는, 이제 모든 쾌감이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쾌감이 있다.
정크푸드형 쾌감: 이것은 주로 도파민 시스템의 즉각적인 요구에 반응하는, 반응적이고 충동적인 쾌감이다. 자극적인 음식, 의미 없는 SNS 스크롤링, 과도한 오락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 특징은 짧고, 강렬하며, 반드시 그 후에 공허함이나 자기혐오라는 ‘숙취’를 남긴다는 것이다. 또한, 내성을 유발하여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한다.
질 좋은 쾌감: 이것은 나의 장기적인 성장에 부합하는, ‘자애’의 목소리에서 비롯된 쾌감이다. 운동 후 느끼는 상쾌함, 어려운 책을 읽고 새로운 지식을 얻었을 때의 지적 희열, 창조적인 활동에 몰입하는 즐거움, 타인과 깊이 연결될 때의 따스함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 특징은 은은하고, 지속 가능하며, 내성을 유발하는 정도가 적고, 그 과정과 결과 모두에 깊은 의미와 보람을 남긴다는 것이다.
결론: 쾌락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쾌락의 주인이 되는 길
이 모든 고찰의 끝에서, 나는 명상이 우리를 금욕주의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오히려 명상은 우리를 ‘쾌락의 미식가’로 만든다.
과거의 나는 굶주림에 허덕이며,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면 정크푸드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내 앞에 놓인 수많은 쾌락의 메뉴판을 차분히 들여다보고, 지금 나에게 가장 유익하고 질 좋은 음식이 무엇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미식가가 되어가고 있다.
명상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자유는, 쾌락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쾌락을, 언제, 얼마만큼, 어떤 방식으로 즐길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주도권의 회복’이다.
바람을 선택할 자유는 없지만, 그 바람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 그것이 바로 명상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위대한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