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하는 법 3단계 : 언어와 개념의 해체

명상의 최종장

by 김종환

개념이 만드는 고통


우리는 매 순간 세상으로부터 쏟아지는 무수한 자극과 정보를 마주한다. 이 모든 것을 동등하게 처리할 수 없기에, 우리의 뇌는 지극히 경제적인 방식을 택했다. 바로 모든 것에 ‘중요도’라는 꼬리표를 붙여 분류하고, 해석하고, 저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탁월한 전략이지만, 그만큼 분명한 한계와 부작용을 낳는다. 우리는 스스로 중요하다고 규정한 것들 때문에 기뻐하고, 또 그것들 때문에 고통받는다. ‘중요한 것’은 정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한 적은 없는가?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좋은 것’을 좇는 삶의 끝에서, 우리는 왜 늘 결핍감에 시달리는가?


1단계 ‘호흡 알아차리기’를 통해 생각의 폭풍우 속에서 잠시 멈추는 법을 배웠고, 2단계 ‘의미와 상징의 해체’를 통해 세상에 덧씌운 나만의 이야기를 걷어내는 법을 배웠다면, 이제 마지막 3단계에 이를 시간이다. 이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 그 자체, 즉 우리를 가두는 가장 교묘한 감옥인 ‘언어’와 ‘개념’을 해체하는 작업이다.



‘좋음’이란 무엇인가?


이 위대한 해체 작업은, 우리가 가장 당연하게 여기는 개념 중 하나인 ‘좋음’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도대체 ‘좋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좋다’고 규정하며 살아왔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좋다’고 믿는 가치들의 대부분은 나의 순수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배경과 시대의 필요에 의해 잘 설계된 교육 시스템, 혹은 미디어를 통해 주입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그 가치들을 비판 없이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하지만 그 모든 ‘좋음’의 근원을 파고들면, 결국 남는 것은 하나뿐이다. 우리는 오로지 ‘쾌감과의 관계’에 의해 ‘좋음’을 정립해왔다. 어떤 행위가 나에게 유쾌한 감각(도파민 분비)을 주었으면 ‘좋은 것’으로, 불쾌한 감각을 주었으면 ‘나쁜 것’으로 규정하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원시적인 방식이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내가 단지 몇 번 기분이 좋았다고 해서, 불쾌했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인가? 그 쾌감의 기억만을 좇는 삶이, 나에게 ‘지속가능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



‘언어’와 ‘인식’이 가진 명백한 한계


우리가 이처럼 불완전한 ‘좋음’의 개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인식 체계 자체가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력의 한계: 우리의 지능은 무한대가 아니며,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서도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 피곤할 때 내리는 판단은 얼마나 비논리적인가.


언어의 한계: 우리는 ‘내가 아는 단어’로만 세상을 정의하고 이해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우리가 아는 단어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무수한 현상들이 존재한다. 언어는 세상을 확장하는 동시에, 나의 인식을 그 언어의 틀 안에 한정 짓는다.


경험의 한계: 우리가 기껏해야 몇십 년 동안 쌓아온 개인적인 경험은, 세상에 존재하는 무한한 정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물 안의 작은 경험을 가지고, 세상 전체가 그러할 것이라고 성급하게 일반화한다.


기억의 한계: 심지어 그 작은 경험을 저장하는 ‘기억’조차 완벽하지 않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며 쉽게 왜곡되고, 감정에 의해 윤색되며, 현재의 필요에 따라 재편집된다.


감각의 한계: 이 모든 정보의 입력 통로인 우리의 오감과 신경계조차,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우리는 이처럼 제한적이고, 편향되었으며, 심지어 종종 고장 나는 불완전한 도구(뇌와 언어)를 가지고,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삶의 가장 중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언어’와 ‘개념’을 해체하는 작업의 기대효과


만약 우리가 이 불완전한 개념의 감옥에서 걸어 나올 수 있다면,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충동’의 중립: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충동)’과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의지)’ 사이에서, 어느 한쪽이 무조건 옳다는 편향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비로소 그 둘을 동등한 선택지에 올려놓고, 가장 유익한 것을 선택할 권위를 되찾는다.


‘가치’의 중립: ‘그것이 옳다’ 혹은 ‘이것이 정답이다’라는 독단적인 판단에 여유를 갖게 된다. 나의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타인의 다른 관점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경직으로부터의 자유: 세상을 ‘좋고 나쁨’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누고, 나쁜 것을 피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유 없는 긴장감과 에너지 낭비를 멈출 수 있다.


집착으로부터의 자유: ‘성공해야만 한다’, ‘인정받아야만 한다’와 같은 억지스러운 당위성과, 그 당위성이 채워지지 않을 때 발생하는 근거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해체 과정: 내 안의 낡은 법전을 다시 쓰는 법


이 해체 과정은, 이전 단계들과는 시작점이 다르다. 2단계가 외부의 ‘대상’에서 시작했다면, 이 3단계는 내 안의 ‘감정’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왜?’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왜?’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나는 왜 저 차를 볼 때 박탈감을 느끼는가?’, ‘나는 왜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은가?’ 그 감정의 뿌리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배움’과 ‘경험’을 직시한다: 질문의 끝에는 언제나 같은 답이 있다. ‘나의 관점’은 ‘내가 배운 것’에서 왔고, ‘내가 배운 것’은 ‘나의 경험’에서 근거한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마주한다.


‘나의 경험’을 의심한다: 여기서 가장 불편하지만 중요한 단계로 나아간다. 나의 그 소중한 경험이, 과연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고 객관적이었는가를 의심한다. ‘나의 쾌감 시스템은 생존을 위해 경제적으로 작동했을 뿐이며, 사실 정보는 충분하지 않았고, 나는 감히 그것들만 가지고 세상의 진리를 규정할 정도로 똑똑하지 않다.’ 이 불편한 진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사실’과 ‘해석’을 분별한다: 이 의심을 바탕으로, ‘관찰 가능하여 명백한 사실’과, ‘나의 주관에 의해 해석되고 있는 사실처럼 보이는 것’을 명료하게 분별한다.


‘존재’만이 남는다: 이 모든 해석과 평가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나면, 마지막에는 오직 ‘그것이 거기에 있음’이라고 하는, 이름 없는 ‘존재’ 그 자체만이 남는다.


무채색의 세상과 마주한다: 감정과 가치가 중립 상태에 놓이면, 세상은 잠시 아무런 색깔도 없는 무채색의 풍경처럼 느껴질 수 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가치를 ‘재창조’한다: 바로 이 고요하고 텅 빈 무채색의 세상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짜 ‘나의 색’을 칠하기 시작한다. 아주 천천히, 사려 깊고 섬세하게 ‘내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바’를 가려내고, 나만의 ‘쾌감 회로’를 재규정한다. “나는 무엇을 할 때, 어떤 것을 바라볼 때 진정으로 즐겁고 싶은가? 그리고 그것이 내 삶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다음 단계는 없다, 하지만 돌아올 곳은 있다.


이것으로 나의 3단계 명상법에 대한 설명은 끝이 난다. 그렇다면 4단계는 무엇인가? 4단계는 없다. 만약 다음 단계가 있다면, 그것은 다시 ‘호흡을 알아차려라’는 1단계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3단계를 거쳐 돌아온 '호흡'은 처음의 그 '호흡'보다 평화롭고 깊이있으며 질적인 차별점을 가지는 호흡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1단계에서 우리는 ‘지금 여기 이곳의 나’를 찾는 법을 배웠다. 2단계에서는 ‘지금 여기 이곳의 나와 저것’의 관계를 재규정했다. 그리고 3단계에서는 ‘나와 나 자신’의 관계, 즉 나의 인식 체계 자체를 재규정했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우리는, ‘낭비’와 ‘경직’으로부터 우리 삶의 주도권과 행복의 제어권을 되찾을 수 있다. 모든 것을 해체하고 난 뒤, 가장 순수하게 남은 ‘나’로, 다시 첫 번째 호흡을 시작하는 것.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keyword
이전 26화명상하는 법 2단계 : 의미와 상징의 해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