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행복은 손쉽게 설계된다.
내가 뭘 원하는지, 뭐하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막막함과 마주한다. 그럴 때 세상은 보통 “당신이 좋아하는 걸 찾으세요”라고 쉽게 조언한다. 하지만 나는 이 조언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싶다. ‘무엇인가를 좋아하게 되는 그 과정 자체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 즐거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삶의 중요한 동력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즐거운 감정은 우리가 원할 때마다 등장하는 자판기 음료수가 아니다. 뇌의 보상예측오류(RPE) 시스템에 의해, 즐거움은 특정 ‘조건’이 충족될 때만 제한적으로 등장하는 귀한 손님이다.
우리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시간과 힘, 돈을 어딘가에 열성적으로 투입한다. 그 과정에서 경험이 쌓이고, 그 경험 위에서 ‘취향’이라는 것이 조각된다. 우리는 그 취향에 따라 선택하고, 비용을 지불하며,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다.
이 글은, 이 모든 과정의 배후에 있는 ‘쾌락의 메커니즘’을 해부하고, 그것을 역이용하여 스스로 행복을 ‘설계’하는 법에 대한 나의 탐구 기록이다.
누구나 즐겁고 싶다, 그러나 즐거움은 비싸다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당신은 행복해지기 쉬운 사람인가, 아니면 어려운 사람인가? 이 질문의 요지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느냐는 비용 논리에 있다.
무엇을 할 때 즐거웠는가? 우리는 보통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특정 ‘대상’을 찾아낸다. 게임, 여행, 맛있는 음식, 혹은 어떤 성취. 하지만 우리는 그 이유와 절차에 대해 더 깊이 살펴봐야 한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는 뇌의 작동 원리상 ‘어떤 것이든 좋아하도록 설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잘하는 일을 해서 얻는 효능감, 누군가보다 앞서 나갈 때의 우월감, 무언가를 만들어냈을 때의 성취감, 사람들과의 유대를 통한 연결감. 이 모든 긍정적 감정은 우리 뇌에 ‘쾌감’이라는 보상을 준다. 즉, 적절한 환경이 제공되고, 충분한 기회에 노출되며, 나의 능력이 목표치에 부합하게 되면 즐거움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문제는, 이 즐거움의 ‘비용’이 계속해서 증가한다는 점이다. 어제 나에게 100의 쾌감을 주었던 게임은, 오늘이 되면 80의 쾌감밖에 주지 못한다. 우리의 뇌는 같은 자극에 빠르게 적응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어제와 같은 쾌감을 느끼기 위해, 더 어렵고, 더 자극적이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언젠가 우리는 천장에 부딪힌다. 내가 즐겁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노력의 비용이, 나의 능력과 자원을 상회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는 이야기다.
‘즐거움’의 ‘조건’ 설계도를 관찰하라
바로 이 지점에서 의심은 시작된다. ‘사실 내가, 충분한 개입과 설계에 의한다면, 무엇이든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느끼는 ‘하기 싫음’, ‘귀찮음’, ‘부담스러움’은, 모두 비용 논리에 의한 뇌의 감정적 판단이다. 그 일에 투입해야 할 에너지에 비해, 예상되는 즐거움의 목표치가 너무 멀고 높거나, 그 예상치가 너무 낮다고 판단될 때, 우리의 뇌는 에너지를 투입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저항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이 저항이 ‘누군가의 칭찬이나 독려’, ‘작은 성공이나 성취’와 같은 몇 가지 외부 장치가 개입되면 아주 쉽게 무너진다는 것이다. 억지로 시작한 운동도, 친구가 옆에서 함께 뛰어주거나, 어제보다 100미터를 더 달렸다는 작은 성취가 더해지면 행동 동기가 부여되고 즐거움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질문해보자. 내가 이처럼 외부 조건에 의해 쉽게 동기가 부여되는 단순한 기계에 불과하다면, 지금 내가 ‘좋아한다’고 믿고 있는 것들 또한, 수많은 선택지 중 그저 우연히 먼저 경험했을 뿐인 하나의 대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어떤 과정을 거쳐 행복해질 것인가’조차도 선택사항이다.
이처럼 즐거움의 발생 메커니즘은 다소 단순하다. 우리는 굳이 거창한 성취가 아니더라도, 침대에 누워 릴스나 쇼츠를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저비용의 즐거움으로 삶을 채우고 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어떤 공허함과 마주하게 된다. ‘이 행복이 과연 유지가능한가?’, ‘이것이 정말 나에게 유익한가?’ 우리는 투입되는 자원(시간)은 점점 더 많아지는데, 돌아오는 즐거움은 점점 더 적어지는 수익 체감의 법칙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우리의 시대는 역설적이다. 즐길 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팽배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하고 슬퍼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의 뇌가 단순히 쾌락의 총합만으로 행복을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가치 있는 것’에 대한 판단을 한다. 여기서 ‘더 가치 있다’는 것의 의미는, 그 이익에 뒤따르는 ‘연쇄적인 이익’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길게 기대되는지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 A(유튜브 시청)를 하면 B(즉각적 즐거움)가 좋다. (연쇄 종료)
* A(운동)를 하면 B(몸의 건강)가 좋고, B가 좋으면 C(정신 건강)도 좋아지며, C가 좋아지면 D(업무 효율)도 개선되고, D가 좋으면 E(자존감 상승)마저 좋아진다.
우리는 이 이익의 연쇄가 길게 배치되어 있는 행위를 본능적으로 ‘가치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들을 비교해낼 수 있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어떤 것을 통해 즐거워하고 싶은지’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선택’의 책임감
그 선택은 ‘지금 이 순간, 당장 내 가용 범위 안에서’ 계획되고, 즉각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히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여행, 명품 소비 등)로 삶을 꾸려나가는 행위는 비주체적이다. 그 ‘좋음’이 나에게는 고비용 저보상의 행위일 수도 있는 법이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 혹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의 연쇄적 이익을 계산할 수 있는가? 그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 행동을 실제로 하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이 과정을 반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삶을 ‘즐거움’으로 가득한 ‘행복한 삶’이라고 스스로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결론이 조금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주, 그리고 많이, 가치 있는 즐거움을 느끼면 행복한 삶이다’라는 것이, 다소 기계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이 내가 나의 내면을 해부하고 관찰한 끝에 도달한, 가장 정직하고 현실적인 결론이다.
나의 ‘쾌락 설계도’를 다시 살피다
혹여나 그대의 삶이 불행하고 공허하다면, 또는 희망만 가득해서는 투입하는 자원에 비해 즐거움이 적어 지쳐가고 있다면, 자신의 ‘쾌락 설계도’부터 다시 살펴봐야 한다.
* 첫째, 내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 ‘고비용 저보상’의 시스템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을 과감히 버리는 선별 작업이 필요하다.
* 둘째, 가치는 높지만 너무 힘들게 느껴지는 행위가 있다면, 그 일을 더 작게 쪼개거나, 작은 보상을 약속하는 방식으로 ‘비용’을 낮추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 셋째, 비용은 낮지만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행위가 있다면, 그 행위가 가진 숨겨진 의미와 장기적 이익을 상기하며 ‘보상’을 키우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기술보다 더 좋은 것은, ‘지금 이곳의 나에게 주어진 이것과 저것’으로부터 ‘그에 마땅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나의 둔감해진 감각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다. 이는 ‘억지 감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50만큼의 만족감을 주는 평범한 식사 앞에서, 이런저런 불만으로 만족감을 0으로 만드는 대신, 온전히 50만큼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대의 삶이 불행하고 공허하다면, 어쩌면 그 원인은 행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고장 났기 때문은 아닌지, 여기서부터 의심을 시작해야 한다.
명상은 여기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공하며, 그 자체로 해결책이 된다. ‘그렇게 힘 들이지 않고도 즐거울 수 있다’면, ‘그렇게까지 해서 즐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던지는 질문 : 만약 ‘즐거움 버튼’이 있다면 그대는 그 버튼을 기쁘게 가져가겠는가?
만약에, 세상의 문제를 다 해결해주지도 않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며 모든건 그대로인데, 이 버튼만 누르면 그순간 결핍감과 불만이 다 사라지고 지루하거나 피곤하지도 않으며, 열등감, 우울하거나 후회되는 감정마저 완전히 해소시켜주는 버튼이 있다면, 그리고 그 버튼을 누르는 데 이렇다할 대가가 없다면 그대는 그 버튼을 가져가겠는가? 아니면 포기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