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하고있었든지간에, 잠깐 멈춰라.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달리고 있다. 때로는 전력으로 질주하고, 때로는 힘겹게 발을 옮긴다. 어쨌든 그는 멈추어 있는 것보다 나아 보인다. 하지만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는 지금 무언가로부터 도망가는 중인가, 아니면 무언가를 향해 쫓아가는 중인가?”하는 목적과 상태의 문제다.
이 질문은 우리의 모든 행동을 관통하는 가장 근본적인 동기를 다룬다.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첫걸음이다.
행동의 두 갈래: ‘도피’와 ‘추구’
우리는 ‘좋으려고’ 뭐든 한다. 그 메커니즘은 허망할 정도로 단순하다. 기분이 좋으면 ‘행복하다’고, 기분이 나쁘면 ‘불행하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고 싶어서’, 본능적으로 ‘기분 좋음’을 쫓는다.
하지만 그 ‘좋음’을 향한 동기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바로 ‘불행하기 싫다’는 도피의 동기와, ‘즐겁고 싶다’는 추구의 동기다.
1) 불행으로부터의 도피와 예방
우리는 ‘불행’과 ‘불편’이 예상되는 상태와 패턴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부적 강화’, 즉 불쾌한 자극을 제거하여 특정 행동을 유지하는 원리가 이와 관련 깊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우리를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 열심히 다니고, 일터에 꾸준히 출석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행복해서라기보다, ‘안 그러면 문제가 생기니까, 이거라도 안하면 큰일 날 것 같아서’라는, 예상되는 불편과 불리함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일 때가 많았다.
2) 즐거움의 추구
반대로 ‘즐거움’과 ‘쾌감’이 예상되는 상태와 패턴에 우리는 머무르고자 한다. 행동주의의 ‘정적 강화’, 즉 긍정적인 보상을 통해 특정 행동을 강화하는 원리다.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심리가 우리를 이끈다. 그렇게 힘들지 않거나, 내가 지불할 수 있는 비용 한도 안에서 ‘즐거움’을 획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길을 선택한다.
두 길의 극명한 차이: 경직과 유연
도피와 추구. 이 두 가지 길은 겉보기엔 모두 ‘더 나은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도망치는 삶은 ‘경직’된다. 공포에 의해 움직이는 삶은 힘의 안배가 어렵다. 전력으로 도망치거나, 두려움에 얼어붙을 뿐이다. 공포의 대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사회적 시선, 학습된 위계의식, 결핍과 불안은 마치 영원히 나를 쫓아오는 그림자와 같다. 우리는 그 고정된 위협을 피하기 위해, 늘 한정된 경로로만 도망 다녀야 한다.
쫓아가는 삶은 ‘유연’하다. 추구에 의해 움직이는 삶은 상대적으로 힘의 낭비가 덜하고 조절이 가능하다. 내가 추구하는 ‘지속 가능한 즐거움’의 대상은 유연하게 바뀔 수 있다. 오늘은 달리기의 즐거움을, 내일은 독서의 즐거움을 쫓을 수 있다. 심지어 내가 그 즐거움의 방향과 강도를 직접 재설정할 수도 있다. 선택권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도피의 종착역: 무너지는 대피소
그렇다면, 불행을 예방하고 도망치는 작업이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인 보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짜릿한 쾌감이 아닌, ‘안도감’이다. ‘결국 그렇게 비참해지거나 불행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그 모든 도피의 행위를 보상한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일시적이다. 불행은 또 다른 모습으로 가면을 바꿔 쓰고 우리를 쫓아온다. 우리는 계속해서 도망가야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공포는 우리를 잠시 움직이게 하지만, 계속해서 도망친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더 안전한 요새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허일 뿐이다.
물론, 때로는 반드시 도망쳐야 한다. 집에 불이 났는데 리모델링부터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작물을 기르기 위해 잡초는 뽑아야 한다. 삶의 기반을 위협하는 급박한 위기 앞에서는, 도피와 예방이 최우선 전략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불이 꺼진 뒤에도, 잡초를 다 뽑은 뒤에도, 내 삶의 모든 자원을 오직 다음 화재와 잡초를 걱정하는 데에만 쏟아붓는 것이다. 시간과 노력, 자금이라는 100의 예산이 있다면, 그 100 전부를 사고 예방과 안전 관리에만 쏟아붓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므로, 그만 도망쳐라
경직된 삶은 우리의 행복을 저해한다. 불필요한 긴장감과 에너지의 과투입을 낳기 때문이다. ‘공포’는 우리를 경직시키지만, ‘추구’는 우리를 이완시킨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그 동기를 바꾸어야 한다. ‘문제가 생길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것이 나의 성장에 유익하고 의미 있기에’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유익하고 의미 있는 행위를 스스로 선별하고, 그 길을 쫓아가는 용기를 내야 한다.
즐거움이 의무감이 될 때
하지만 이 ‘추구하는 삶’에도 함정은 있다. 기쁜 마음으로 취직에 성공했지만, 어느 순간 괴로움을 안고 출근하는 나를 발견한다. 즐거움으로 운동을 시작했지만, 어느새 의무감과 부담감에 억지로 몸을 움직이는 나를 발견한다.
‘추구’가 어느새 또 다른 ‘도피(의무감을 다하지 않았을 때의 죄책감으로부터의 도피)’로 변질되는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다시 합리적인 의심을 시작한다. “이게 더 이상 즐겁지 않기에 반복하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그 행동이 가진 ‘연쇄적인 이익’을 신뢰하고, 그것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지금의 이 작은 노력이 나의 건강과, 정신과, 관계와, 미래에 어떤 긍정적인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지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희망적이며 기대되고 흥미롭고 재밌어야한다.
나는 이 절차를 ‘명상’이라고 해석한다. 명상은 우리의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불안과 초조함을 발견하게 해주며 내가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반응하는 지 보여준다. 그들을 직시하고 나면, 나에겐 그들을 통제하고 선별하고 선택하고 조절할 수 있는 통제력이 길러진다. 그다음엔 ‘그래서 이제 뭘 어쩔 것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해 준다. ‘효과적이고 안전한 도피행위’가 되는 동시에 ‘추구하는 방향을 향한 행동의 시작’의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반복되고 익숙해지면, 우리는 더이상 sns나 쇼츠, 릴스 따위로 우리의 불안감과 스스로를 향한 한심함과 가책을 마취시키지 않을 수 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나가며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는 삶을 불행하다고 평가하고 비관하지 않을 수 있다. 다소 낯설더라도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으며, 적절한 자원 안배를 통해 적정한 즐거움을 설계하고 향유할 수 있다.
도망치는 삶을 멈추고, 가치 있는 것을 쫓되, 그 쫓는 과정마저 지혜롭게 설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행복이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삶이라는 바다를 현명하게 항해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