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서 자유인으로 가는 길
이번 이야기는 부끄럽지만 나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할까 한다.
나는 1971년생으로 2차 베이비부머(1968~1971년생) 세대에 속한다. 1차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 세대에 이어 1971년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아이가 태어난 해로, 그해 출생아 수는 100만 명에 육박했다. 다들 가난했고, 사회적으로도 결핍이 많았던 시기에 살았다.
내가 졸업한 대학교는 인구 30만이 채 되지 않는 지방의 작은 도시에 있다. 처음 가본 그 동네 이름은 학교에 다니면서 알게 되었다.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당연히 수업도 건성 건성이었다. 졸업한 게 신기할 정도로 F학점만 간신히 면할 정도였다. 대학 졸업 후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미래는 일당 잡부 정도밖에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형편의 친구들은 대개 사업이란 걸 시작했다. 사업을 해서 아주 크게 성공하거나, 완전히 망해서 연락처조차 삭제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됐을까?
일당 잡부밖에 꿈꿀 수 없던 스무 살의 나는, 30년이 지난 2025년 3월 현재 외국회사 상무 타이틀을 7년째 고수 중이다.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이루어, 언제든 명퇴를 당하더라도 노후가 걱정되지는 않을 정도가 되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의 영어 토익 점수는 500점이 채 되지 않았다. 그 당시 나를 포함한 부모님 모두 월세방을 전전했다. 친구들과 고스톱을 해서 돈을 따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지능이 높은 편도 아니었다. 그랬던 내가 현재 위치에 이른 것은 첫째 운이 좋아서였고, 둘째는 입사 초기의 특별한 경험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나만의 공간을 가지게 된 사건이 가장 큰 성공의 발판이었다.
당시 90만 원이었던 대학등록금조차 마련하지 못하던 나는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우유팩을 들고 하루 100집을 방문했고, 남는 시간에는 자동차 세차장에서 일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있다. C++프로그래머가 돈을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루 종일 하고 받은 돈은 고작 시급 900원쯤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래머들의 보수는 아르바이트라 하더라도 달랐다. 그 시기에도 월 100만 원은 훌쩍 넘게 받았다. 나는 경영학 전공으로 ‘문송한(문과라서 죄송한)’ 학생이었다. C++에 왜 더하기가 두 개인지 궁금할 정도로 개발언어는 전혀 몰랐다. 월 1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최소한의 코딩만 할 수 있는 정도까지 학원에 다녔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지금의 직장에서 사람을 긴급히 채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합격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지만 일단 접수했다. 인터뷰 때 지잡대를 영 못마땅해하는 부장님이 있어 ‘이번에도 당연히 떨어졌구나’ 하고 체념하고 있었다. 늘 있는 일이었고, 워낙 좋은 회사였기 때문에 내가 먼저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합격 전화가 왔다.
“한금택 씨 축하합니다. 이번 입사시험에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다음 주부터 출근 가능한가요?”
내가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입사를 원하던 나를 제외한 모든 합격자는 회사가 원하던 날에 출근이 불가능했다. 합격 통지를 받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라는 조건이었다. 갑작스러웠던 극악한 입사조건이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셈이다. 공부도 형편없었고, 스스로 열등생이라 여겼던 나는 합격이 너무나 감사했다. 정말 감사해서 회사가 시키는 일이라면 사람 제거 일 말고는 뭐든 다 할 기세였다. F학점을 겨우 면했던 지방대 출신이 대기업에 입사한 뒤, 구름 위를 걷던 나에게 한 가지 인생의 힌트인지 아니면 절망적인 미래의 청사진인지 모를 조금 특이한 일이 발생했다.
우리 회사에 상무님이 두 분 있었다. 한 분은 수학을 전공한 여성 상무님이다.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엘리트였다. 인프라를 담당했던 상무님은 언제나 말씀이 적었지만, 시스템의 파워 케이블부터 데이터베이스 클러스터링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분의 기술력과 끝 모를 지적 수준은 나의 롤모델로 삼기에도 과분했다. 상무님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분이었다. 최고학부 출신에다 최고 성적의 유능한 인재였다. 영어도 유창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지신 분. 특히 그의 능력과 화려한 그의 학력은 내가 두 번 태어나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분은 아마 나 같은 신입사원을 몰랐을 것 같다.
내가 입사하고 1년째 되던 날, 존경하던 상무님이 퇴사하게 됐다면서 번개 회식을 했다. 회식 1차에 여직원들이 빠져나갔고, 2차에 부장급과 간부급들이 자리를 떴다. 3차까지 이어진 술자리에는 다들 빠져나가고 나와 상무님만 남아 정말 죽을 때까지 마셨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상무님은 너무나 서럽게 울었다. 너무 많이 우셔서 정신을 잃으셨고, 나는 댁에까지 택시로 모셔드리고 집에 왔다.
그땐 그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비통한 울음의 의미를 잘 몰랐다. 그냥 뭘 할 때마다 달그락거리는 느낌으로 떠오르는, 꼭 해결해야만 할 미스터리 숙제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울음은 오래도록 나를 놓지 않고 따라다녔다. ‘그리 서러운 울음의 의미가 뭘까?’ 그때 하늘 같던 상무님은 내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텐데. 나 같은 풋내기 앞에서 그토록 비통하게 울다니! 그때 상무님이 나에게만 직장생활의 비밀을 말해 주었는데, 내가 미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일까. 나는 그 정답이 어딘가에 있을 거란 기대로 골똘히 찾아다니곤 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됐는지, 신참내기인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분처럼 퇴사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나는 절대 서러운 눈물로 퇴사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직장생활을 10년쯤 하고 난 후부터는 문득 그분의 퇴사 기억이 떠올라 나도 언젠가 퇴사할 날을 상상해봤다. 그러면서 나는 퇴사할 때 가짜 웃음, 만들어진 웃음이 아닌 진정한 자유와 행복감과 함께 회사를 떠나야겠다는 일종의 퇴사 목표가 생겼다.
그렇게 직장생활 24년이 흘렀다. 2025년 3월 현재 나는 그분이 쓰시던 의자에 앉아 있다. 직장생활의 경험과 생각이야 서로 크게 다르겠지만, 나도 곧 퇴사를 맞이해야 할 나이다. 다시 그때 그분의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올랐던 울분과 서러움을 반추해본다. 직장생활만큼은 그분과 흡사한 길을 걸어왔기에 이제야 희미하게나마 그때 그분이 지은 울분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퇴로가 없었을 것이다.
학교에서도 우리는 퇴로가 없다. 1등이든 꼴찌든 1등을 향해 무한 경쟁을 하며 달린다. 직장에서도 퇴로는 없다. 정해진 규칙과 시간에 맞춰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빠르게 직진해야 하는 일방향 전쟁이다. 퇴로는 없다. 후진도 없다. 정해진 레이스 위에서 정해진 룰대로 앞뒤 가릴 것 없이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경주를 가장 앞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온 분에게 퇴로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젊었을 때는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앞장서 달린다. 하지만 누구나 나이가 들면 레이스 위에서 갑자기 내려와야 할 때가 찾아온다. 그동안 정해진 룰대로 일해온, 우수하고 충실했던 희생들이 한순간에 부정당한다. 그때 그분의 상황이 그랬을 것이다. 마치 “결승점이 저기다. 달려!” 하는 말을 듣고 달려온 곳에서 “왜 여기로 온 거야? 돌아가!”라고 반문하는 답변을 듣고 분했을 것이다.
회사생활이 그런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재어 보고, 의심하고, 퇴로를 준비하면서 달렸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그렇게 앞뒤 재면서 최대속력으로 달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이사급이 되었다는 것은 회사를 위해 자신의 대부분을 희생했다고 봐야 한다. 자신의 젊음과 시간, 노력을 다 바쳐도 임원에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분이 퇴로를 만들지 못했던 이유도 그렇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해온 그분의 직장인의 삶에서 퇴로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미리 퇴로를 만드는 행위를 오히려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임원이 되고 나서 회사에서 제공하는 수준 높은 대우와 위상들에 묻혀 퇴로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현재에 만족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나는 애초부터 엘리트나 천재와는 반대 방향인 돌연변이였기 때문이다. 정통이 아니라 잡것에 가까운 쪽이었다. 나는 회사 라인에 설 때도 가장 굵은 라인은 일부러 피했다. 내가 적자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뒤에서 동료들 도와주는 역할에만 충실했다. 나는 입사를 하자마자, 엘리트 출신의 높은 분들과 경쟁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라 단정하고 직장생활의 모든 업무를 다르게 보고 다르게 행동했다.
대신에 급여를 너무나 감사히 받았고 그 돈을 오직 나를 위해 사용했다. 그때 선배 상무님의 울음의 의미가 ‘퇴로 없음’이라는 것을 아득히 느낄 때쯤 나는 퇴로를 만들었다. 직장인에게 퇴로란 직장인의 신분을 내려놓았을 때, 직장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성내동 현대아파트를 아무 대책도 없이 매수했다. 이 책을 통해 줄곧 공간과 본진(本陣) 이야기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간은 우리에게 아낌없이 삶의 도구들을 제공한다. 공간은 내가 넘어졌을 때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재충전의 시간을 제공하고,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지식 업그레이드의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공간은 내가 원할 때 더 큰 공간을 소유할 기회도 아낌없이 제공한다. 나의 퇴로 확보는 공간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덕에 내가 상무 위치에 오를 수 있었으며, 많은 후배에게 도움이 되는 선배가 될 수 있었다. 내가 ‘퇴로’ 확보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선배 상무님처럼 끝까지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능력도 학벌도,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퇴로가 필요했다. 급여가 통장에 들어올 틈도 없이 대출 이자로 대부분 빠져나갔지만, 나에겐 그것이 나의 유일한 퇴로였다.
회사는 법인 인격체라 시장 상황에 따라 좋을 때도 있고 많이 어려울 때도 있다. 나는 돌연변이 출신이라 회사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기 때문에 회사에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성실히 출근했다. 나만의 퇴로가 생긴 후부터는 이해할 수 없는 여유 같은 것이 생겨났다. 집을 소유한 이후로 회사에 급여를 올려달라고 요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보통은 집을 사고 이자를 갚느라 허덕대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아파트가 족쇄가 된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 다만 회사가 나의 직위는 챙겨 주기를 바랐다.
2030 직장인에게 퇴로는 아직 낯설 수 있다. 언제나 기회가 있을 것만 같은 무한의 가능성을 내포한 젊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장인이라면 언젠가 퇴사해야 할 날이 온다. 언젠가 후배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고 내려와야 한다. 그때 돌아갈 곳이 없다면, 환송하는 후배들을 뒤로하고 과거와는 다른 길을 가야 하는데 그 길이 준비돼 있지 않다면, 그때 우리는 ‘퇴로 없음’이라는 팻말을 보게 된다.
퇴로가 없다면 그대로 주저앉거나, 후배들과 경쟁해야 하는 부끄럽고 애매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회사를 돈 버는 곳으로 다니지 않게 된 것은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 즉 집 때문이다. 집이 알아서 돈을 벌어 주었기 때문이다. 회사는 내가 집을 매수하는데 필요한 직장인 대출만 잘 받아 주면 감사했다. 그래서 나는 회사와 정 반대편에 서지 않을 수 있었다. 회사와 전쟁을 하지 않고 상생할 수 있었으며, 그 덕에 상무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직장인들 대부분이 회사의 의도와는 반대편에 서 있다. 회사는 급여를 주고 근로자는 시간을 판다. 이 둘의 전쟁에서 승자는 없다. 왜 그럴까? 만일 회사가 승리하면 직원은 적당히 일한다. 그러다가 급여를 조금만 더 준다는 회사가 있으면 경쟁회사라도 그 즉시 이직한다. 서로 매정한 관계다. 회사가 직원에게 연봉을 작게 올려준다고 해서 승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반대로 직원이 승리해서 원하는 연봉을 받았다고 하자. 그럼 직원이 승리한 걸까? 천만에. 회사는 돈으로 돌아가는 조직이다. 코스트는 수익과 연동된다. 즉 급여를 많이 받으면 그만큼의 역량과 실적을 곱하기로 내놔야 한다. 자신의 능력보다 더한 업무량과 책임을 짊어지고 일하다가 건강을 잃고 포기하는 동료들을 많이 봤다. 이들은 회사와의 전쟁에서 절대로 승리한 것이 아니다.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다행히 집이 있었다. 직장과 집이라는 자산은 나에게 든든한 엔진이 되어 주었다. 이 두 개의 엔진은 나만의 작은 배가 목적지를 향해 흔들리지 않고 달릴 수 있도록 했다. 사회라는 거대한 바다를 항해할 때 동료들은 단 하나의 제트엔진을 달고 나를 빠르게 추월했다. 그들에게 집이라는 사이드 엔진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단 하나의 엔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최고학교 졸업장과 좋은 직장, 약속된 승진은 인생의 고성능 엔진으로 손색이 없었다. 반면에 나는 느리긴 해도 튼튼한 두 개의 엔진으로 그들과의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의 빠른 엔진과 두 개의 느린 엔진을 탑재한 직장인의 승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의 지난 24년간의 경험은 우연히도 스콧 애덤스의 베스트셀러 《더 시스템》의 내용과 일부 맥락에서 같다. 스콧과 그의 친구 마뉴엘은 간절히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여자친구를 찾아 나섰다. 스콧은 오직 한 여자에게만 구애를 집중했다. 그가 1년 후 그녀에게서 들을 수 있는 최종 답변은 ‘Yes’나 ‘No’ 둘 중 하나다. 하지만 그의 친구 마뉴엘은 학교 안에서 거의 대부분의 여학생을 상대로 연애를 시도했다. 누구에게나 ‘나랑 사귈래?’ 하며 접근했지만, 대답은 거의 ‘No’였다.
하지만 우리는 1년 후 마뉴엘의 구애 결과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스콧은 50%의 확률로 성공할 수 있겠지만, 마뉴엘의 성공확률은 처음에는 0%에서 시작해 계속 증가할 것이다.
스콧은 단 하나의 목적으로 시간을 보냈다. 실패했을 경우 아무런 대안이 없다. 반면에 마뉴엘은 다양한 가능성에 도전했다. 단 한 여자가 아닌 그가 아는 모든 여자를 상대로 도전했다. 그는 하나의 목적에 실패했어도 다른 대안을 가지고 계속해서 도전했다. 인디언은 사막을 건널 때 말을 여러 마리 끌고 간다. 한 마리가 중간에 쓰러지더라도 다른 말로 갈아탈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이다.
직장에서 누가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직장인들 대부분이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한다. 오직 직장생활에만 올인하다가 실패를 맞이한다면 큰일이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