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회색 인간이 되었는가?
나는 50대 직장인이다. 오늘도 지하철을 타고 2030 직장인들과 함께 9시 정시에 출근한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30년 동안 유지하고 있다. 내가 2030이었을 때 조금이라도 먼저 세상 공간이 아닌 내 공간에서, 남의 시선이 아닌 나에 대한 고민을 더 깊이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공간은 2030 직장인이 만들어가는 시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나의 색은 회색이다. 무난하다. 열정적인 붉은 색도 아니고, 차갑고 이지적인 푸른색도 아니다. 그저 그런 회색이다. 나의 원래 색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노란색 아니면 흰색이었을 것 같다. 그저 밝고 말하기 좋아하는 세상 물정 모르던 20대였으니까. 그러다 20대 후반쯤 직장에 들어가 하늘 같은 선배님들과 무서운 과장님, 그리고 천상계에 계신 부장님의 뒤를 따라 열심히 살았다. 후배가 생겼고 그들에게 멋진 선배가 되고 싶어 더 열심히 일했다.
나의 업무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복잡한 세금을 계산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한 치의 오차라도 있으면 프로그램 전체가 쓸모없게 된다. 나는 완전한 로직을 만들기 위해 강박적으로 밤새워 코딩을 했다.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완벽히 돌아가는 재무 회계 시스템 중 내가 만드는 모듈은 급여라는 아주 작은 부품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만든 코드는 전체 시스템과 맞물려 매끄럽게 돌아가야 했다. 어느덧 너무나 자연스러운 시스템이 완성되었다. 사람들은 시스템을 마치 산소처럼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사용했다. 나는 나의 색을 지우기 위해 죽도록 노력했다. 마치 이마에 주홍글씨가 박혀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과 같아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10년쯤 그렇게 직장에서 나의 색을 지우고 선배가, 사회가 가르쳐준 색을 내 몸에 발랐다. 사실 그때만 해도 내 몸에 덧칠하는 수준이었다. 또 10년이 흘러 나는 시니어가 되어 있었다. 이제 조직이, 사회가 원하는 색이 내 몸의 색이 되어 있었다. 제법 그럴싸하다. 누구나 나를 보면 0.1초 만에 회사원이라고 생각한다. 흰 와이셔츠와 검은 재킷, 광나는 신사 구두를 신고 출근한다. 나는 완벽한 회색 인간이 되었다.
30대 중반쯤, 과장이었을 때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쌍둥이 아들딸을 갖게 되었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육아에 대한 부담감도 컸다.
동훈이와 윤서는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 이젠 어른이 되었다. 공부를 더 잘해서 반에서 학교에서 1등이 되기를 바랐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대기업에 들어가 안정적인 월급을 받기를 바랐다.
잠깐! 그때는 몰랐다. 아이들도 나처럼 회색의 삶을 살아가길 바란 내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는 아이들에게 나와 같은 삶을 강요한 것 같다. 생존을 위해 너의 색을 최대한 지워라. 먹고 살기 위해서는 너의 천재성과 너의 본질적인 꿈과 희망을 포기하고 회색을 받아들여라. 회색 인간이 되어서 군중 속에 숨어들어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이 되어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하기만 한 삶을 살아라.
회색 인간들이 세상에 넘쳐난다. 사실 본인이 회색 인간인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조직에 순응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나 생각쯤은 쓰레기통에 멀찍이 던져 버린다. 그리고 매뉴얼을 읽는다. 사규를 꼼꼼히 이해하고 암기한다. 남는 시간엔 유튜브를 본다. 자신만의 색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조직에 빠르게 적응한다.
2030 직장인들은 선택할 기회조차 없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하기에 회색을 받아들이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라고 나도 이해한다. 하지만 자신의 색을 계속 소유할지, 버리고 회색을 받아들일지는 선택에 달려 있다.
27세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해 지금까지 뜨겁게 살아온 나로서는 동훈이가, 윤서가 회색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좋겠다. “힘들더라도 자신만의 꿈을 잃지 마라.” 뭐 이런 유치한 충고를 하려는 게 아니다. 자신의 색을 버린다면, 그래서 사회가 바라는 스탠다드가 된다면 나이 먹을수록 무가치해지기 때문이다. 스탠다드의 다른 말은 대체 가능 상품이다. 삶은 오래될수록 더 가치 있고 품격 있어야 하는데, 스탠다드가 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치열한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젊고 힘센 젊은이들과 경쟁해야 한다. 나는 스탠다드이기 때문이다.
후배들에게 밝히고 싶지도 권할 자격도 없지만, 동훈이 윤서에게는 아무리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하더라도 패배가 확정된 게임을 하라고 권할 수 없다. 대체 가능한 포지션으로 직장생활을 한다면 시간은 결코 내 편이 되지 못한다. 회색 인간의 삶을 살게 되면 시간이 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져 언젠가는 같은 색에게 패배하고, 살아 있었는지조차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로 사라질 수 있다.
회사는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쉬는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혹시라도 튀어나온 2030들만의 색은 회사 보안 게이트에 ID카드를 대는 순간 깨끗하게 지워진다. 이런 생활을 10년, 20년 하고 나면 자신의 색은 완전히 소멸해 회사가 입혀준 회색만 착색된다.
동훈이는 이제 더이상 동훈이가 아니다. 아마 24874419번으로 불릴지 모르겠다. 아들에게 주어진 이 숫자를 내가 외우지 못하면 동훈이를 식별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2030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고유한 색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무방비 상태인 2030들에게 매일같이 사회는 회색 페인트를 온몸에 덮어씌운다. 2030들이 자신만의 색을 지워지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2030들에게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하루 한 시간이라도 멍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원래 색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리 바쁘게 살아가는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2030 직장인이 이 전쟁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만의 공간에 머무는 것이다. 그 공간에서 회색으로 변해 가는 자신을 지켜야 한다. 원래의 고유색이 무엇이었는지, 원래 무엇을 꿈꾸고 있었는지 잊히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억을 끄집어 올려야 한다. 이 고통스럽고도 복잡한 작업은 오직 자신의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왜 자신의 색을 지켜야 할까? 왜 회색이면 안 되는 것일까?
직장생활만으로 50대 중반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이제야 깨달은 것이 있다. 회색 인간으로는 경쟁력이 없다. 부품과 같은 회색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다. 자신의 색을 유지하고 키워나가는 것이 처음에는 더디고 힘들겠지만, 결국 고유의 색은 대체 불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