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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뒷면 Jun 22. 2023

몸으로 지르는 소리

관장님의 설명에 시선만 고정한 채 정신은 사방을 떠돌고 있다. 오늘 들었던 그들의 말들이 뱅글뱅글 머릿속을 맴돈다. 상대를 앞에 두고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나 망설이다 멍하니 멈춰 섰다. 순식간에 상대에게 제압당했지만 도망치지 못하고 버둥대다가 시간이 지나갔다. 일도 육아도 운동도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 무엇 하나 제대로 못하는 내가 못마땅해 한 대 때려주고 싶다. 왜 이렇게 못났을까?


요즘의 나는 일터에서 쓰다 버린 물건처럼 외면당하고 있다. 공식적인 평가의 무대에서 권력을 가진 포식자들에게 먹잇감이 되었다. 어쩌다 덥지 않은 존재락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내가 가진 역량을 조금 더 늘리면서 조직에 좋은 발자국을 남기고 다. 여리고 소심한 마음에 혼자서 끙끙대며 아등바등했고, 팀원 각각의 성향에 맞추려 눈치도 보았고, 억울하고 방어적인 태도로 돌변하기도 했다. 그것이 못마땅해 보였을까? 감히 너 같은 것이 그런 무모한 도전을 려 하냐고 꾸짖는 소리에 둘러싸였다. 무방비하 무력해진 내가 참을 수 없 초라하다. 무엇을 잘못한 건지, 그들에게 미덥지 못한 존재가 된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되뇌어 본다. 뚜렷하게 말하지 않는 그들의 주변을 맴돌며 추리와 궁리를 오고 간다. 내가 했던 실수들 때문 일까? 탈락된 유를 물어볼까?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선택을 두고 나아가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등배근부터 쇄골을 둘러싼 목 근육이 뻐근하다. 어깨와 무릎 관절이 삐걱이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맨소래담은 바디로션이고 파스는 반창고다. 내 몸에서는 향긋한 향수 향 대신 알싸한 파스냄새가 감돈다. 한 발짝 내딛을 힘이 없게 기운이 쏙 빠진다. 이런 학에 가까운 운동을 왜 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를 괴롭히려고 안달이 났다. 퇴근하고 저녁을 준비하고 나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반쯤 감긴 눈을 하고 도복을 챙겨 다.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매일 몸을 혹사하려 체육관으로 향하는 것일까? 기술도 엉성하고 힘도 조절하지 못해서 제압당하고 도망기 바쁘다.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그랬다. 노련한 상대를 만나기라도 하면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탭(항복을 의미)을 치고야 마는 일이 다반사다. 왜 나는 매일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려고 체육관으로 향하는 것일까? 매질당한 것 같은 몸을 끌고 터벅터벅 집으로 오면서 이 집념의 기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해졌다.


근사하고 번드르르한 얼굴을 하고 가시 돋친 말을 태연하게 하는 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자기주장이며 정의라고 포장하는 이들, 장황하게 말하며 언쟁하기를 즐기는 요란한 들, 점잖은 체하지만 진득한 속물근성을 숨기지 못하고 상대를 깔보는 들, 함부로 침범하고 평가하기를 즐기는 이들, 적대를 호의로 가장하고 훈계를 멈추지 않는 이들 민감하고 예민한 감각은 그런 사람들의 행태를 선명하게 느낀다. 외면하고 태연한 척해보려 하지만 역겹고 물 날 때가 많다. 그 따위 소리는 집어치우고 닥치고 꺼지라고 속 시원하게 내지르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이곳, 분노를 억누르고 예의를 차려야 하는 이곳, 근거 없는 낙관에 편승해야 하는 이곳 여기에서 나는 매일 조금씩 생략되고 흐려진다.


롤을 하면서 공격자(탑)가 방어자(가드)를 뚫려고 기술을 시도할 때가 있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몸을 최대한 밀착하여 작게 만드는 것이다. 둥글게 몸을 말아 움켜쥔 공벌레처럼 말이다. 공벌레는 외부의 자극이 있을수록 더 작게 몸을 숨기고 움츠린다. 오늘 나는 공벌레다. 무례와 모함에는 재간이 없다. 그래서 최대한 나를 작고 조용하게 만들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눈에 띄지 않도록 숨긴다. 꾸며진 자존감으로 미소와 표정을 덮어쓴. 오직 나를 표현하지 않 것이 전부인 것처럼 냉소와 건조를 둘러쓴다. 뜨거워지지 않으려고 가슴을 차갑게 식히고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것만이 지금을 피해 가는 최선이다.


말 한마디로 멀리 날아가버린 것들을 떠올리며 스파링을 한다. 골반을 들고 다리를 등에 붙이고 몸을 수평으로 맞춘다. 몸은 정직하다. 아무것도 숨기고 감추지 않는다. 움직이는 만큼 반응하고 쓰는 만큼 작용한다. 늦은 밤, 에어컨이 꺼진 체육관은 땀에 젖은 도복과 붉게 상기된 얼굴과 흐트러진 머리칼과 거친 숨소리로 채워진다. 운동에는 번역해야 할 언어가 없었다. 몸이 움직이는 대로 반응하고 따라가면 되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을까? 의식적인 비판과 검열을 멈추고 몸의 반응에 집중할 수 있었다. 뒤집어지고 깔릴지언정 상대를 향해 성큼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익숙한 우울과 삶의 쓸쓸함을 내칠 수 있었다.


내 눈과 몸을 의심하면서 기술을 반복하고 서툴지만 맹렬하게 상대의 몸으로 파고든다. 설사 꼼짝없이 붙들려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훌러덩 뒤집여 목이 졸리고 다리가 묶여도 번쩍 들려서 매트에 뒹굴어도 멈추지 않는다. 땀이 뚝뚝 떨어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이렇게 해도 될까 이게 가능할까 망설이던 내가 입을 앙 다물고 상대에게 몸을 던진다. 손과 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몸에 무게를 실어 상대의 틈으로 파고든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오기가 나를 자극한다. 내뱉지 못하고 삼킨 말들이 격렬하게 몸 밖으로 탈출한다. 무너져가고 흩어져가는 마음이 눅진한 땀방울로 맺힌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찮지 않다고 니들 맘대로 평가하고 값을 매겨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들지 말라고 지금의 나는 위선과 오만을 둘러쓴 어떤 이를 향해 포효하는 한 마리 사나운 짐승이다. 일터에서 뺨 맞고 체육관에서 눈 흘기는 비루한 짐승이다.



출처: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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