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개는 덕구에게 자기 마음을 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신동리에 살고 있는 귀머거리 순자에 대한 자기의 숨겨진 순정을 약간은 밝힌 셈이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덕구가 살고 있는 중골에 동네 사람들이나 덕구, 그리고 덕구의 아내가 엉가엄마와의 혼인을 은근히 말하는 것에 대한 일침이기도 했다.
방개는 엉가엄마와 엉가를 정말 자기 자식이나 마누라모양 신경 쓰고 아끼지만 엉가엄마와 혼인할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엉가엄마가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이미 오래전부터 신동리에 순자에 대한 마음이 있었기에 그 마음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잘 감추어둔 보석처럼 어쩌다 그가 꺼내보는 보물함이었다.
방개는 어쩌다가 순자가 보고 싶으면 이른 봄 산에 올라가 진달래를 꺾어다가 순자네 장독대 위에 올려놓거나, 황금빛이 물든 들판을 걷다가 보랏빛 들국화를 한 아름 꺾어서 그녀의 대문 앞에 갖다 놓고는 했다.
그리고 어쩌다가 과수원에서 일을 할 때는 순자에게 줄 말랑말랑한 복숭아나 빨갛게 익은 홍옥을 한 바구니씩 가지고 가서 순자에게 안겨주고는 왔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커다란 눈을 꿈뻑이며 그에게 웃지도 못하고 겁을 잔뜩 먹은 강아지처럼 한걸음 다가왔다가는 선뜻 달아나고는 했다. 그런데 속담에도 귀머거리는 남의 말을 듣지를 못하니 자기에 진실만 말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그런지 순자는 어쩌다 한마디 하는 고맙다는 인사도 그렇게 자기 말만 하고 후딱 달아나는지 그런 점이 방개로써는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방개는 순자가 복숭아나 사과 바구니를 받으러 자기 앞에 서면 그녀에게서 그렇게 좋은 향기가 났다. 그 향기는 가을에 짙은 모과향 같기도 하고 어느 날은 여름의 노랗게 익은 참외 냄새 같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그녀에서 이슬 맺힌 아침에 옥잠화꽃 향기가 나서 그 향기를 맡던 날 방개는 처음으로 몽정이란 것을 했다.
방개는 자신이 남성인 것도 알고, 예전에는 남부럽지 않은 부잣집에서 비록 첩의 자식이긴 했어도 그가 밥도 굶지 않고 중학교도 다닌 사람이니 자신이 무엇이든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전쟁과 어머니의 가출과 배다른 형들의 폭력 그리고 친아버지의 학대가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마른 잎을 갉아먹는 곤충들처럼 그의 기억 속을 아픈 상처들이 갉아먹고는 했다.
그럴 때면 방개는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었고, 한 곳에 머물고 싶지가 않았다.
방개는 순자에게 줄 호떡을 온양장에 가서 사가지고 왔다. 호떡은 참 달고 맛이 있어서 순자가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호떡을 먹는 순자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방개의 마음도 어찌나 달콤한지 방개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순자의 손을 잡아채서 어디론가 달아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순자와 함께 이렇게 달고 맛있는 호떡을 사 먹으며 온양장에도 가고 이쁜 순자에게 머리에 파마도 시켜주고 싶고 그녀에게 시장의 옷가게에서 부인들이 입는
긴 월남치마도 색색이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방개는 순자를 데리고 살 자신은 없었다. 순자는 착한 효녀였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신처럼 떠돌아다니는 습성을 가진 남자를 만나서 산다면 분명 순자는 불행하고라고 방개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병든 어머니도 보살펴야 하고 동생들도 돌봐야 하는 순자가 자기 같은 떠돌이 남편을 만나서 산다며 분명 귀머거리 순자로써는 생활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방개로써는 그저 순자의 얼굴을 보면서 살 수만 있다면 그녀가 결혼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순자가 어떤 남자랑 살아도 방개는 순자를 영원히 짝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 것이었다.
진하고 검은 순자의 눈동자가 밤하늘에 별처럼 반짝거릴 때마다 방개는 자신의 그 진심이 이 세상 끝날까지 이어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엉가엄마와 엉가를 생각하면 지금 자기의 처지로써 장가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방개는 모처럼 온양장에서 호떡을 한 봉지를 담아서 그걸 들고 걷고 또 걸어서 신동리 순자네 집 앞에 다다랐다. 이미 해가 기웃하니 서산을 넘어가고 순자네 집에서는 된장찌개 냄새가 담장을 넘어와 구수하니 배가 고픈 방개의 코를 찔렀다.
부뚜막에서 밥을 하고 있는 순자가 사립문 사이로 보이자 방개는 얼른 호떡이 든 봉지를 부엌 앞으로 가지고 가서 킁킁 거리는 큰 소리를 냈다.
귀가 먹은 순자는 알아듣지를 못하자 방개가 부엌 옆에 있는 작대기로 부엌의 문을 세게 한번 쳤다.
놀란 순자가 부뚜막에서 반찬을 들고 밥상에 올리려다가 눈을 황소처럼 크게 뜨고는 뛰어나왔다. 방개를 본 순자가 놀래서 그런지 인상을 찌푸리며 화를 낸다.
그래도 방개는 순자를 본 것이 너무 좋아서인지 손짓 발짓으로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는 호떡 봉지를 그녀의 손 위에 얹어 준다.
호떡 냄새가 순자의 코를 놀라게 했는지 그녀가 금세 미안하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방개에게 웃어 보이니
방개는 온양까지 호떡을 사러 갔다 온종일 걸어갔다 온 피곤함과 고단함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걸 느끼고는
순자에게 어서 밥을 차리라고는 말하고 막 마당을 나오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순자가 자기를 불러 세우는 것이 아닌가.
"방개, 방개 이거 봐요, 저녁, 저녁을 드시고 가셔유."
그 순간 방개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기도 하면서 순자의 동생들이 저녁이 되어서 집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방개는 배가 몹시 고프기도 했지만, 순자가 곤란할까 싶어 다시 마당을 돌아서 나오려는데 순자는 다시 방개를 다급하게 불렀다.
"우리 엄마가 방개 오면 밥 주라고 했어유, 된장찌개랑 저녁 잡수고 가셔요, 마루에 챙겨 드릴께유. 잠깐만 기다려유."
그때 안방에 창호지 미닫이 문이 덜컹하고 열리더니 순자의 엄마가 간신히 일어나 앉은 모습으로 방개를 보고 환하게 웃으신다.
"자네 왔구먼. 어서 오게나,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뭘 그리 가지고 오나. 저녁 먹고 가게네. 내가 자네 오면
밥 좀 대접하라고 순자한테 일러놨으니 오늘 저녁은 밥 좀 먹고 가게나."
순자가 얼른 방개가 사 온 호떡을 자기 어머니 앞에 내밀자 순자의 어머니 눈이 화들짝 놀라며 얼굴에 희색이 만연한다. 순자 어머니는 살아생전 호떡보다 맛있는 음식은 그리 많이 먹어보질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