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 어머니의 혼인 청탁을 두말도 못하고 뛰어나온 채 방개는 하염없이 논둑과 밭뚝을 걸었다.
어둑해진 저녁의 해온도는 이미 차가운 돌처럼 냉랭해도 방개의 가슴만큼은 아직도 순자를 향해서 그립고 따스한 아궁이불 모양 가슴이 후끈후끈 달아만 오른다.
방개는 순자에게 주려고 호떡을 하나도 먹지 않고 고이고이 싸서 가지고 갖던 터라 고봉밥을 내온 저녁밥을 순자 어머니의 청혼에 놀라서 몇 숟가락 남기고는 후다닥 뛰어나온 것이 후회도 되었다.
금세 배가 등창에 붙었는지 출출하니 뭔가를 더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방개는 주변을 두리번 댔지만, 추수가 끝난 가을 들판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방개는 서둘러서 엉가와 엉가엄마가 있는 덕구네로 가기로 했다.
거길 가야 그래도 김장김치에 국수라도 한 그릇 말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방개는 뜨거운 국수를 생각하자 자신이 혼인집에 가서 주로 부르던 일명 '방개타령'이 생각이 났다.
생각난 김에 방개는 헛기침을 서너 번 하고는 '방개타령'을 불렀다.
작년에 왔던 방개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얼씨구 씨구 씨구 돌아간다,
절씨구 씨구 씨구 돌아간다.
안은 고리는 동구리, 선 고리는 문고리 뛰는 고리는 개구리,
옹달샘에 쌀방개, 금빛 같은 쌀방개, 둥실둥실 잘도 논다.
오라는 집은 없어도 갈 집은 많다
문전걸식 열 집에 허기진 배를 못 채우고
작년에 왔던 방개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혼인이라는 정상적인 삶을 생각할 수 없다고 방개는 늘 자신을 그렇게 어르면서 살았는데, 순자 어머니의 순자와의 청혼은 방개에게는 가히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방개는 순자가 자기보다는 더 사는 게 나은 사람과 혼인이 되어야 한다고 자신을 채근할 뿐이다.
늘 마음이 헛도는 자신 같은 사람은 결혼을 해도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순자를 고생시키면 안 될 거 같아서도 방개는 혼인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다 보니 어느덧 덕구네 사랑채 앞에 방개는 서 있었다.
방개의 노랫소리에 문을 연 것은 벌써 학교를 다니는 엉가였다. 엉가가 방개를 보고는 아버지를 본 듯이 반갑고 기쁘게 맨발을 벗고 달려 나와 방개의 품에 안긴다.
"아저씨 어디 갔다 와유, 나 학교에서 오늘 공부 많이 하고 왔는데. 아저씨 내가 공부 가르쳐줄까."
엉가는 딸처럼 방개가 누더기 옷을 입었던지 땀에 전 옷을 입었던지 상관치 않고 누리끼리한 옷에 땀이 절은 옷을 입은 방개의 손에 매달려 아양 아닌 아양을 떤다.
방개는 엉가가 어서 학교에서 공부를 많이 해서 대처에 나가서 중학교도 가고 고등학교도 하고 대학까지 나와서 신식여성이 돼서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영어선생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가 중학교 때 그렇게 가고 싶던 미국이란 나라에도 가서 영어를 더 배우고 오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본다. 눈이 쌍꺼풀 지고 다리가 긴 것이 엉가도 아직 어린 여자애지만 인물도 서구적인 모습이 있어서 공부를 조금 잘하면 신랑감도 분명 잘 찾을 거라는 믿음도 방개에게는 있었는데, 엉가가 끌고 가는 손을 잡고 사랑채에 들어가 보니 엉가 엄마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웬 남자 옷을 하나 만들고 있었는데, 이 솜 저 솜 틀어서 누비옷을 만드는 모양인데, 바느질 솜씨가 보통 좋은 게 아니다. 웬만한 양반집에 얌전한 규수가 대대로 물려받은 바느질 솜씨를 자랑하듯이 그 솜씨는 아주 빼어나게 고왔다.
엉가 엄마가 바느질하던 손을 내려놓고 약간 놀란 듯이 방개를 보더니 배시시 웃어버린다.
"누구 옷이래요, 옷이 비단처럼 곱구먼요."
"예, 거기 드릴라고 내가 진즉부터 만들었소. 다 되었는데 입고 나가슈."
엉가엄마는 언제 정신이 나간 미친 여자였냐는 듯이 멀쩡히 대답을 하더니 바느질을 마무리하고는 다 꿰맨
겨울 누비옷을 방개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솜이 들어간 누비옷을 걸치니 방개는 어느 사이 자신이 고래등 같았던 아버지의 집에서 자기 아버지가 늘 겨울이면 두툼한 누비옷을 입고 장대 곰방대를 물고는 안방에 앉아서 약주를 마시던 모습과 자신이 닮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엉가엄마가 해준 누비옷을 입은 동네 사람들이 방개를 보고는 다 입을 떡하니 벌렸다. 옷의 색감과 솜씨가 너무나 좋아서 방개가 금세 환골탈태한 어느 부잣집 바깥양반처럼 행세를 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고, 그 옷을 만든 사람이 엉가엄마라는 소리에 마을에서는 갑자기 이불이 닳아서 해진 솜이나 쓸만한 천을 들고 엉가엄마에게 누비옷을 좀 지어달라는 사람들이 엉가네 문간에 줄을 선 것이다.
덕구도 그 덕에 맨 먼저 솜과 새천을 한벌 사다가 엉가엄마에게 주고 누비옷을 한벌 얻어 입었는데, 아무리 봐도 온양 옷가게에서 해 입은 것보다 면장의 새 누비옷보다 더 좋아 보여서 놀랄 정도였다.
"아니, 엉가엄마 저 여자가 미친 게 아니었나 봐. 워떻게나 이렇게 손재주가 좋다야."
"그러니까 정신이 온전치 않게 된 게 전남편이 때려서 그렇다는 말이 맞겠지. 맞는 바람에 정신이 돌아서 집을 나온거라데."
"아무튼 동네에 저리도 손재주 뛰어난 여자가 있으니 올 겨울 바느질은 안 해도 되겠네 우리는."
마을 아낙네들이 엉가네 집을 왔다 갔다 설레발을 치고 난리들이었다. 방개와 덕구도 엉가엄마가 미친 여자에서 갑자기 온마을에 바느질감을 해결해 주는 솜씨 좋은 여자로 등극을 하자 먹을 거가 줄줄 들어오고 돈도 쪼금씩 엉가엄마에게 생기자 둘은 그저 신바람이 나서 사람들이 올 때면 고구마라도 구워주느라 아궁이 앞에서 바쁘게 왔다 갔다 거렸다.
방개는 아궁이 앞에서 방개타령도 부르고 아리랑도 부르고 도라지타령도 부르고 난리가 났다. 그리고 엉가엄마가 바느질거리가 많아질수록 이상하게 엉가엄마의 정신의 상태가 아주 온전해지고 대체로 말짱하게 일상을 하는 날이 많아졌다.
아무래도 엉가엄마가 정신이 온전히 돌아온 것 같다고 마을에서는 다들 야단이었다. 그건 덕구나 덕구의 아내가 볼 때도 그랬다. 엉가 엄마는 이제 정상인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엉가엄마는 자기 집이 어디인지 신랑이 누구인지 부모나 형제가 누구인지는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물어보는 이 앞에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엉가엄마는 셈도 곧잘 해서 누구에게 공연히 옷을 해주지는 않고 꼭 자기가 받아야 할 삵을 받아내는 야무진 구석이 있어서 덕구는 그 점을 잘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엉가 엄마를 온양장에 시장 안에 큰 포목점에 취직을 시켜야 할까 봐. 저 솜씨면 거기서 이불도 꿰매고 저런 누비옷도 만들고 하면 돈을 잘 벌거 같은데. 방개 자네 생각은 어떤가. 엉가엄마를 온양에 보내는 건 말이여."
덕구가 어느 날 방개를 붙잡아 놓고 넌지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