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가가 미국으로 떠나고 방개는 엉가와 엉가엄마 윤희와 살았던 기나긴 긴 인생의 여정을 돌아보았다. 결혼을 한 여자가 아니었지만, 엉가와 엉가엄마처럼 자신이 떠돌던 기나긴 청춘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은 없었던 것이다. 엉가가 엉금엉금 비 오는 원두막을 기어 다니던 어리고 어린 아기의 모습에서 이제는 대학을 졸업한 숙녀가 되어서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며 미국이란 낯선 이국땅으로 훌쩍 떠나가니 방개의 마음이 엉가엄마 윤희를 암으로 저 세상에 보낼 때처럼 슬픈 것은 아니어도 딸을 시집보낸 친정아버지 같은 마음이 들었다.
엉가가 아버지라고 자연스럽게 불러주고 방개 자신도 딸처럼 엉가를 생각해 줬지만, 호칭이 주는 의미 이상으로 엉가와 방개의 관계는 혈연의 뜨거운 가족애처럼 무엇인가 그들을 피처럼 끈끈하게 삶을 지탱해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엉가를 보낸 봄이 다 가도록 딸이 금방 대문을 열고 들어오며 '아버지'하고 부른 것만 같아서 바람만 불어도 대문가를 밤낮으로 서성댔다. 그리고 곽집사와 함께 사는 스무 명의 아이들이 정신없이 떠들고 부산하게 학교와 집을 오가도 그는 가끔씩 그렇게 대문가를 서성대며 밤을 지새우며 시를 써 나갔다.
장터에서 엄마에게 버림받은 어린 날의 기억,
열네 살 소년병에서 살아남은 고통,
그리고 전쟁의 공포와 죽음에 대한 공포로 환청에 시달리던 사춘기의 괴로움,
다 하지 못한 공부와 배다른 형들의 폭행과 배척으로 쫓겨나 떠돌이가 된 기억들,
배고픔으로 떠돌던 시절 만난 벙어리 순자를 향한 첫사랑,
미친 여자 엉가엄마와 아기 엉가를 데리고 구걸하던 시간들,
그리고 순자와 엉가엄마를 저 세상으로 보낸 아픔과 슬픔,
홀로 있는 밤에
낮달이 밤까지 따라왔는지 몰라서 하얀 반달을 보며 지나간 시간들을 셉니다.
사랑도 이제는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고, 당신에게 보내지 못한 시와 편지들이
내 머리맡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뭇별 같습니다.
아, 배고픈 날 씹어 먹던 진달래꽃, 아카시아꽃, 그 꽃과 같던 사람들 다 떠나고
고요히 나를 돌아보면 내게는 거울도 없이 울던 자화상이 있었나 봅니다.
장독대 곁에서 울던 벙어리 여인 사랑하여 두고 온 진달래꽃은 지천으로 산천을 둘러싸고
머리 풀고 배고프다고 울던 여인은 아카시아 꽃잎 하얗게 따서
입에 넣어주며 같은 설움 풀었는데,
그 곱디고운 여인들은 떠나고 나는 홀로 질경이처럼 질기게 이 땅에 살아남아서
소똥구리 밟고 지나가는 늙은 황소처럼 그렇게 느리게 가지만, 그러나 남은 힘으로 끌고 가야 할
달구지에 버려진 아이들 가득 태우고 저 황혼을 지나서 밤이 이슥한 시간에
내 외양간에 도착하였네라.
그러나 홀로 있는 밤에 나는 외로워 소나기 같은 눈물 흘러 보내며
어둠 속에서 핀 하얀 목련 나무 그늘에 서서 누구에게 이제는 편지를 쓸까 고민하다
인생의 기나긴 슬픔은 묵은땅에 묻고 새 땅을 기경하려고 쟁기를 듭니다.
신이시여,
내가 사랑한 신이시여,
그러나 나는 당신을 알 수 없습니다. 이 운명의 길고 긴 나그네 길.
하늘도 땅도 나는 알 수 없고, 오직 하늘에 계신 어떤 분이 있어 날 여기까지 끌고 왔나 봅니다.
그분이 태초부터 나를 창조하여 이 먼지 만도 못한 나를 여기 이곳에 보내어
한날한시를 알 수 없게 하셨고, 바람을 불게 하셨고, 나를 이제 여기 홀로 있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사랑한 세상처럼 나도 이 세상을 사랑하여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내 달구지에 실린 아이들과 이웃들을 사랑하려 하니 이 달구지가 참으로 무겁습니다.
그래서 홀로 있는 내 밤은 그저 한없이 고요하고 외로워 싸라기 같은 하얀 싸리꽃이 피는
내 이웃집의 가난한 울타리를 어루만지며 홀로 걸어갑니다.
군대에 간 철희가 사고로 한쪽 눈이 멀어서 돌아온 것은 엉가가 떠나고 그 해 가을이었다. 방개는 철희에게 일층에 가장 넓은 방을 내주고 그곳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철희는 커다란 목련 나무가 있는 정원이 보이는 창가에 이젤을 세워놓고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다.
방개는 철희가 바닷속에 들어갔다 나온 하얀 미지의 새처럼 그렇게 찬란하게 날개를 푸드덕 거리며 날아오르길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엉가가 돌아오는 날에 이 집에서 철희의 그림 전시회를 멋지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방개아저씨와 천사들의 집'이 철희의 그림 전시회장이 되고 엉가의 옷들을 입은 버려진 아이들이 넓은 정원의 잔디 마당을 마음껏 뛰놀 때 기환이 영화의 첫 장면을 찍는 상상을 했다.
기환은 그즈음 다시 영화 대본을 쓰고 있었는데, 그 영화의 제목은 "방개아저씨와 엉가"였다.
방개는 이제는 중년을 넘긴 나이지만, 아직도 먼 타국에 있는 딸 엉가를 기다리는 것이 행복했던 것은 기환이 쓰는 각본에 자신과 엉가가 주인공이라는 것 때문이만은 아니었다. 엉가가 자기 등에서 배고픔과 설움과 아픔과 고통을 그리고 엄마를 떠나보낸 슬픔을 잘 견디고 패션 디자인이라는 엄마의 재능을 이어받아서 꿋꿋이 자라고 성장하고 있는 것이 대견해서 방개는 엉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었다.
오래도록 서로 깊이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면 꼭 가슴이 메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서로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고
너무도 아프게 헤어져 울며 평생을 사는지 아는 까닭에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오늘처럼 꽃잎에 편지를 씁니다.
오월의 편지 중에서 / 도종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