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가본 시골집 근처의 겨울 시냇가에는 갈대밭에 바람만 무성했다. 가을 내내 논에 벼들이 황금빛으로 출렁이며 개울가 근처를 아름답게 수놓았을 때와는 달리 삭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몇십 년 동안 서 있는 커다란 아름드리나무들은 단풍이 고왔고, 개울가를 가득 메운 키 큰 갈대들이 바람에 그 머리를 은빛으로 숙이고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이하는 모습에서 자연의 겸손함이 묻어나기까지 했다.
고향의 겨울 시냇가는 우리 초등학교 친구들과의 초라하지만 아름다웠던 캠프 파이어의 추억이 있는 장소이다. 고 2 겨울 방학으로 기억이 난다. 구멍가게 하나가 동네의 유일한 상점이었고, 장항선 완행열차가 한두 시간에 한 대씩 서는 시골 간이역이 있는 나의 고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지금은 동네의 구멍가게 마저 사라지고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편의점이 하나 덜렁 있을 뿐이니 구멍가게의 추억마저 찾을 길도 없는 곳이고 장항선 완행열차가 다니던 간이역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나의 고향은 저수지와 시냇가가 동네 한가운데를 흐르고 완만한 산의 곡선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기차가 다니던 철도와 간이역에는 캠핑장이 들어선 지도 꽤 오래되어서 주말이면 젊은 대학생들이 꽤 캠핑장을 오고 가는 편이다.
오염이 되지 않아서 아름답지만 개발은 영 안 되는 동네가 우리 마을이다. 그 이유는 우선 저수지가 마을을 차지하고 있어서 인데, 우리의 학창 시절엔 그래도 기차가 있어서 그 기차를 타면 서울까지도 장항선 완행열차를 타고 갈 수가 있는 마을이었다.
그런 마을에 살면서 우리는 고등학교를 천안과 온양으로 그리고 예산이나 공주로 나가서 다니면서 각각의 도시에서 맡아온 문화의 냄새들을 겨울 방학이 되면 우리 집 사랑방에 모여서 공유를 했다. 시골뜨기 고등학생들이 모여서 어려서부터 한 마을에서 18년 동안 앞집 옆집에 살면서 친구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젓가락이 몇 개인지 까지 다 알고 더구나 권 씨와 채 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마을이다 보니 친구가 친척인 경우도 많은 그런 집성촌에 살던 우리가 모여서 놀 수 있는 문화란 거의 없었다.
도회지의 친구들이 선생님들 몰래 맥주도 마시러 다니고 우리와는 다른 도회적인 여러 가지 이상스러운 문화를 즐긴다는 소리를 들을 때면 우리는 그것을 호기심 삼아 따라 하고 싶어도 고향에 돌아오면 우리에게 그런 것은 먼 동네의 딴 이야기일 뿐이었다. 여자친구들끼리 모이면 군불을 땐 방바닥에 엎드려 소설책을 읽거나 가래떡으로 떡볶이를 해 먹고 명화극장에서 본 영화 얘길 했다.
그러다가 우리는 고 2 겨울 방학에 우리도 남자애들하고 같이 캠프 파이어를 하며 놀아 보자고 누군가 제안을 했다. 동네에 우리의 또래 친구들은 딱 13명이었다. 각자가 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우리는 친구네 집에서 모여서 친구 엄마들이 사다 준 과자 몇 봉지와 날 고구마를 한 보따리 들고 캠프 파이어를 하기로 한 개울가 논바닥에 모였다.
그리고 볏짚 가리에서 꽝꽝 언 볏짚으로 불을 피우고 나뭇가지와 장작을 주워서 모닥불을 지폈다. 매일 아궁이에 불을 때던 남자 얘들이 모닥불을 피우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기타도 없었고, 맥주 같은 어른 흉내를 내 볼 만한 근사한 술도 없었다. 그런데 누가 가져왔는지 모를 테이프를 넣어서 음악을 틀어야 하는 카세트 녹음기가 한대 있었고 그 카세트 녹음기에서는 팝송이 신나게 흘러나왔다.
나와 내 친구는 그 당시 고전문학에 빠져서 매일 공부는 안 하고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돌려가면서 읽었다. 내가 학교에서 빌려온 것이 있으면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는 그 학교에서 빌려온 것을 서로 돌려가면서 읽는 방식으로 우리는 그렇게 소설에 빠져서 공부도 제대로 하질 않았다. 시골에서 사는 여학생들에게는 대학이란 꿈에도 그릴 수 없는 처지이기도 했고, 입시 학원이나 과외라는 것도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었으니 우리에게는 소설책이나 시집 같은 공부 외의 문학 서적이 우리를 위로해 주는 유일한 지적 욕구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겨울 밤하늘에 유난히 별들이 아름답게 빤짝이고 동네를 둘러싼 잔등이에서는 산짐승의 울음소리도 들렸지만 우리는 활활 타는 모닥불가에서 밤새도록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들으며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네 한가운데 개울가에서 우리 친구들은 그렇게 유별나게 그날 캠프 파이어 놀이를 했다.
올해 여름 난 거의 20년 만에 처음으로 초등학교 동창회를 가봤다. 동네 남자 친구들이건 옆 동네 남자 친구들이건 초등학교 동창 남자 얘들이 거의 다 머리가 하얗거나 아니면 염색으로 검은색은 띠었으나 반쯤 머리가 다 대머리들이 되어 있었다. 서글픈 인생의 민낯이 드러나는 나이가 아닐 수 없어서 웃음만 나오는 걸 참으며 친구들과 그래도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오면서 중년이 넘어가는 이 나이에 동창회는 어떤 의미를 띠는 건가를 생각해 봤다.
내가 시골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으니 작년과 올해는 이래 저래 친구들의 우리 집을 찾아왔고, 친구들은 이제는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나를 무척이나 부러워한다. 아직도 양가 부모님이 살아 계시니 두 분 다 병환 중에 계시긴 하지만 여러 가지로 부러운 모양이다. 지금은 부모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파트에서 나의 작업실을 새로 마련해서 쓰고 있다 보니 엄마집에는 일주일에 2, 3일 정도만 가는 편이다.
그래도 나는 엄마집에 가서 잠을 자는 날에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 근처 시냇가로 산책을 가거나 햇빛이 좋은 낮에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서 함께 냇둑을 산책한다.
내 친구들이 우리 집 사랑채에 있던 내 방에 놀러 오면 언제나 고구마나 떡을 쪄주시거나 이런저런 간식거리를 내놓으시던 젊은 날의 시골티가 전혀 나지 않던 세련된 우리 엄마는 이제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고 뇌경색으로 이제는 화장실 출입만 겨우 가능한 정도다.
언젠가는 나와 내 친구들도 내 엄마처럼 팔십을 넘기고 병들고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열여덟 살 고 2 겨울 방학에 겨울 시냇가 근처 논바닥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들으며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밤이 새도록 인생을 논하고 청춘을 논하고 미래를 논하던 그날들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읽었던 "폭풍의 언덕"이나 "닥터 지바고"를 아직도 또 읽고 고전 영화를 뒤지며 그 영화들을 다시 본다고 해도 그때의 감동과 설레는 문장들을 다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시대는 나 홀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 역시 아파트로 작업실을 옮기고 나서는 혼자 있는 시간들이 처음에는 너무 좋았지만 몇 달 되지도 않아서 난 벌써부터 이 시간들이 계속된다면 나 역시 고독사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올 때가 있다. 그래서 내 아버지가 엄마를 내가 아파트로 모시고 간다고 하면 나 혼자서 집에 있기 싫다고 굳이 엄마를 붙잡아 놓으신 것도 이해가 되는 편이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아버지는 밤이 두려우신 것이다. 그러시다 보니 병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아내라도 옆에 있어야 좋고 자신이 아침을 챙겨줘야 해도 그래도 그것이 행복하다고 하신다.
끝까지 글을 써보겠다고 대작을 써보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요즘 대한민국 최고라는 모문학상에 작품을 응모했다가 떨어지고 나니 기운이 쑥 하고 빠져 버렸다. 하루 3시간의 자유 밖에 없던 작년에 "브런치 스토리"에서 장편소설 "방개 아저씨"를 5개월 정도 연작했었던 것을 고치고 수정해서 투고를 했는데, 난 더 이상 소설가로는 자질이 없는 건가 하는 자괴감만 몰려왔다. 며칠 동안 고향 친구랑 통화도 안 하고 아무랑 별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젊은 날 잘 나가던 작가로 그래도 상도 받고 꽤 했는데, 이제는 책도 별로 안 읽고 글을 쓰려니 나도 욕심이 과한 늙은 주책 같은 소설가는 아닐는지 싶다. 분수에 넘치는 상을 바라고 투고를 했으니 조용히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겨울 시내가를 둘러보러 이번주 토요일에는 눈 쌓인 냇둑을 걸으리라.
그리고 늘 내 문학의 원천인 고향 마을의 아름다운 노을과 저수지와 시냇가와 마을 친구들과 어르신들을 그리고 내 부모와 형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문학상보다 귀한 고향을 다시 내 가슴 깊이 담아야겠다.
도처에서 전쟁의 상흔들과 두려움이 가득한 세계를 보며 나 역시 무섭고 두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올여름에 내가 읽은 책은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 였는데, 요즘은 다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읽고 싶은 겨울이다. 그리고 이 암울하고 우울하기까지 한 전쟁들이 하루라도 빨리 종식되어서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이 없는 세상을 살아보고 싶다.
모닥불처럼 아름답고 따뜻하고 모든 이들을 밝혀주는 소설을 쓸 수만 있다면 이 겨울에도 난 매일 밤 밤을 새워서 글을 쓸 수 있을 텐데 나에게 아직도 그런 능력이 남아 있는 건지 나는 아직 나 자신을 알 수가 없는 폭설이 내린 겨울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