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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Jun 07. 2024

불신

1. 제가 어릴 때 부모님은 항상 바쁘셨습니다. 유치원생이었던 나는 동생과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덕분에 많이 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로 의지하며 잘 놀았던 기억들이 더 많습니다. 물론 지금은 서로 사는 게 바빠 안부 전화조차 쉽지 않지만.     


2. 동생이 태어나기 전이었는지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바쁘신 부모님은 어린 나를 두고 일하러 가시는 게 걱정되셔서 할아버지 댁에 종종 나를 맡기시곤 했습니다. 할아버지댁이 시골이다 보니 버스에서 내려 논 사이로 난 비포장 길을 끝도 없이 걸었습니다. 어려서인지 내 마음이 그래서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사실 그 길이 끝이 없었으면 했습니다. 그래야 엄마와 잡은 손을 놓지 않아도 될 테니까.     


3. 끝이 없었으면 하는 길을 걸어 할아버지댁에 도착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이제 엄마와 잡은 손을 놓아야 하는구나. 울어대며 엄마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습니다. 일하러 가셔야 하는 엄마는 나를 떼어 놓기 위해 달래기를 수차례, 안 되겠다 생각이 드셨는지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셨습니다. 할머니와 간식을 먹으며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화장실 앞으로 갔습니다. 화장실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난 쪼그려 앉아 엄마가 나오길 기다렸습니다. 할머니부터 고모들까지 와서 놀면서 기다리자고 회유하였지만 난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흘러 점심때가 되고, 해 질 무렵이 되었습니다. 저는 화장실 앞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는 내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문을 열어 보고 싶긴 했지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내 두려움이 사실이 될까 봐. 수십 번을 망설이다 슬며시 화장실 문을 열었습니다.   


4. 내 두려움은 사실이었습니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가장 믿어야 될 엄마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5. 화장실 간다고 하고 사라져 버린 일을 제외하면 너무나 좋은 엄마라는 걸 머리로는 잘 알지만 그 하나가 인간관계에서 늘 내 발목을 잡았습니다. 살아오면서 나란 사람은 왜 이럴까 의문이었습니다. 나는 왜 누군가를 만나면 진실된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해 대는 것일까, 늘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기도, 마음을 여는 사람들의 마음을 받기도 어려운 것일까. 앞과 뒤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 표현하는 게 마음 그대로인 사람을 왜 좋아하는지 화장실 앞에서 긴장되는 마음으로 엄마를 기다렸던 일 때문이었다는 것을 대학 때 상담을 받으며 알게 되었습니다. 알게 되니 화장실 얘기만 하며 서럽게 울기도, 원망도 있는 대로 해댔습니다. 속은 시원했습니다.

      

6. 브런치북 "상담실 이야기"에 몇 개의 글을 올리며 편치 않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내 글을 많은 사람이 보는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진실된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정작 내 얘기는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 이야기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만 하는 것 같아 큰 찔림이 들었습니다. 내가 화장실 간다고 거짓말하고 도망쳐 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감추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내 얘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7. 부모로서 최소한 솔직하지 못한 모습 때문에 아이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습니다. 종종 소개로 상담실에 오시는 분들이 솔직한 분이라는 얘기를 듣고 오게 되었다는 말들을 듣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들이 여전히 부모처럼은 살지 않을 테야 하며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가 받은 아픔을 누군가에게 되돌려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겠지 하며 작은 위안을 삼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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