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선지를 제주로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호불호를 얘기할 만큼 제주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고,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언어가 다르지 않으면서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느낌을 원했다. 나의 목적은 제주가 아니라 '도망'에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애석하게도 도망에는 돈이 필요했고, 나는 이제 막 백수가 된 참이었기에 '가성비 있는 도망'을 추구했다. 그날 밤, 제주도 게스트 하우스 카페에 가입해서 스태프 모집글을 훑었다. 대부분의 게스트하우스가 숙식을 제공하는 대신 별도의 임금은 주지 않았다. 2-3명의 스태프가 3일 주기로 교대 근무하며, 청소와 빨래를 주 업무로 했다. 휴무일에는 일반 여행객들처럼 제주 여행을 할 수 있다는 메리트 때문에 경쟁률이 꽤 높았다.
제주 북촌 마을의 풍경
내가 스태프로 가게 된 곳은 7명의 여자들이 살고 있는 '셰어하우스'였다. 매일 새로운 게스트가 오고 가는 게스트 하우스와 달리, 셰어하우스는 말 그대로 공유 공간에서 함께 '산다'는 개념이다. 짧게는 1주일 길게는 1개월 동안 장기 숙박을 하는 손님들로 만실이었다.
25살부터 35살까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들은 서로 닮은 듯 다른 고민을 가지고 제주로 모였다. 7명의 여자가 모여서 하는 얘기는 뻔하지만... 남자였다. 제주로 도망쳐온 이유 중 하나가 남자였기 때문에 또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 같아 실망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내 '매번 상처받을지라도 끝끝내 사랑을 찾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지난 연애, 스쳐간 인연, 그리고 깊게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를 하며 매일밤 서로를 알아갔다. 룸메이트에게서 꼴 보기 싫은 내 모습을 찾기도 하고, 안쓰럽던 내 어린 시절을 보기도 하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모습에 용기를 얻었던 것 같기도 하다.
/2인실 (아침)
유진 (울상 지으며,) 나 진짜 요가복만 잔뜩 챙겨 왔단 말이야.
지혜 수빈아, 우리 옷 좀 빌려주면 안 돼?
아침부터 셰어하우스는 시끌벅적했다. 곧 있을 2:2 데이트를 앞두고 지혜와 유진 언니는 적당한 OOTD를 찾느라 바빴다. 이번에 안 사실인데, 제주도에서는 온라인에서 동행을 구해 함께 여행 다니는 일이 왕왕 있다고 한다. 네이버 카페를 통해 비슷한 또래의 남자 둘과 약속을 잡은 두 사람은 비 오는 날 비자림에 어울리는, 편하지만 예쁜 옷을 찾았다.
수빈 언니들, 이거 진짜 내가 아끼는 옷이에요. 그니까 남친 만들어 와.
24인치 캐리어 두 개를 옷으로만 가득 채워온 막내 수빈은 이들의 일일 스타일리스트를 맡았다. 데이트를 앞두고 들떠 있는 건 당사자뿐 아니었다. 우리는 예쁘게 차려입고 현관문을 나서는 두 사람한테 한 마디씩을 얹으며 놀려댔다.
선미 너네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전화하고, 외박은 안 된다.
35살 선미 언니 혼자 걱정 가득한 얼굴로 동생들을 단속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수적인 맏언니의 상상력이 제일 야하다며 웃었지만, 그것은 인생 선배의 관록이자 정확한 예지였다. 그날 밤 셰어하우스로 돌아온 건, 유진 언니 하나였다.
/2인실 (아침)
다음 날 아침에 들어온 지혜는 곧바로 짐을 싸며 나갈 준비를 했다. 하룻밤을 함께한 남자가 지금 셰어하우스 밖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다며, 돌아와서 전부 얘기해 주겠다고 했다. 붉게 상기된 지혜의 얼굴이 설렘으로 가득 차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궁금하지만 질문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지혜의 데이트를 구경하는 중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지혜의 데이트썰을 들으려면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일주일 뒤. 주방 공용 공간(밤)
지혜 나는 사실 더 좋은 신랑감을 찾고 싶어서 공부하는 걸지도 몰라.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공기업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지혜는 나와 동갑인 서른이다. 어릴 적부터 결혼을 하고 싶었다던 지혜는 170의 큰 키에 하얀 피부의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다. 나는 지혜의 쌍꺼풀이 돋보이는 눈웃음을 좋아하는데, 그날은 붉게 충혈된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지혜 내가 육지에 가서도 진지한 만남을 이어나갈 생각이 있냐고 물으니,
그 자식 결국 대답 안 하더라.
일주일 동안 지혜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그 남자는 관계에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이 오자 지혜를 우리 곁으로 보냈다. 우리는 다 같이 열을 올리며 그 남자를 욕했지만, 지혜는 자신을 탓했다.
지혜 그 순간 나는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알아?
내가 떳떳한 직장을 가지고 있었어도 현실적인 만남을 고려하지 않았을 까?
내가 본인에 비해 조건이 맞지 않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지혜의 말을 들으며, 제주로 도망오기 전 내 머릿속을 헤집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붙잡을 가치가 없는 사람', '영영 헤어져도 아쉬울 것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평가 내렸던 지난날의 나와 지혜는 어딘가 닮아있었다.
도련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들 하잖아. 존재 가치.
근데 또 누군가는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 가치를 높여야 한다.'
라고 얘기하지. 가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군데? 뭐 하는 사람인데?
지혜 잘 모르겠어서, 일단 내 능력이라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어.
도련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라는 거,
그게 정말 가능한 건지 의문이야.
우린 그저 사랑받고 싶을 뿐인데, 뜻대로 안 되니까 내가 당장 바꿀 수 있는 것들에 눈을 돌리는 거 아닐까.
지혜 알아 진짜 해결법은 뻔한 얘기지. 자존감을 높여라.
나도 안다고. 그것만 알면 다 되게? 공부법 안다고 다 서울대 가냐고.
지금껏 우리가 초점을 맞춰왔던 '가치'는 조건의 개념이다. 지혜는 '조건 좋은 남자를 짝으로 만나기 위해 나의 조건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속마음을 술기운을 빌려 털어놓았다. 어쩐지 고리타분하고 조금은 낯부끄러운 이 말에 가만히 고개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건, 우리 모두 한 번쯤 일정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나를 '가치 없는 사람'으로 평가 절하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면서 힘들어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혜 1주일 동안 데이트를 하면서 이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부끄럽게도.
도련 그럴 수 있어. 네 공부의 목적을 바로 달성한 셈이잖아.
지혜 (한숨,) 역시나 그 남자에게 나는 결혼할 만큼의 여자는 아니었던 거겠지.
도련 조건으로 따지면 그렇지. 근데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
그 남자는 언제까지고 그렇게 능력 있을 것 같아?
막말로 나처럼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지혜 (O.L.) 5급 공무원이야.
도련 아... (급하게 화제 전환하며,) 다르게 말하면 너도 그 남자의 조건 하나만
보고 만나려고 하는 건데, 그걸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
지혜 얼굴도 내 스타일이었어.
도련 아...
'더 좋은 사람 만나려고 그러나 보지.'라는 쾌쾌 묵은 위로를 할 바에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미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지혜에게 이런 말은 조급함만 더할 것을 알기에. 결국 근원적인 문제는 '결혼을 해야 한다'라는 목적이 앞선 것에 있었다. 결혼은 해야 하는 거고, 우리는 지금 결혼 적령기이며, 나이가 들수록 괜찮은 사람은 품절남이거나 곧 품절남이 될 사람뿐이다-라는 명제로 다시 돌아왔다.
/insert. 씽씽잇 (밤)
02년생 남자 서른이요? 누나들 결혼 적령기네요.
지혜를 위로한답시고 1시간을 운전해서 도착한 제주도의 가장 핫한 감성포차(라고 쓰고 헌팅포차라고 읽는다) 씽씽잇에서 만난 스물셋 앙큼 보이한테 이런 소리나 듣고 있자니, 이미 다음 세대까지 퍼져있는 이 명제로부터 벗어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어린 남자들과의 시시껄렁한 농담을 30분쯤 나눴나-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을 당한 듯 지혜는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3일 뒤 지혜가 육지로 돌아갈 때까지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명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답을 찾지 못했다. (일단 둘 다 서울대 갈 머리는 아닌 게 확실하다.) 결혼을 꼭 해야 한다라는 목적만 앞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정답은 모두가 알고 있는 자존감에 있었다.
그렇다면, 자존감을 높이는 법은 무엇일까? 유튜브나 책을 뒤져보면, '매일 작은 성취를 느껴라.'와 같은 해결책을 제공한다. 근데 정말로 아침에 침대를 정리하고, 가벼운 운동을 한다고 해서 우리는 자존감이 높아지고, 조건에 연연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글쎄다. 나는 좀 더 구체적이고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
나는 평소에 내가 자존감을 높이는 (잘못된) 방법에 대해 떠올렸다. 연애.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남자친구를 옆에 두며, 쉽고 빠르게 자존감을 높이려고 했던 그 방법 말이다. 그리고 내가 필요로 했던 남자친구의 모습을 다이어리에 적기 시작했다.
1. 나에게 오해를 남기지 않는다.
- 감정에 솔직하며, 속마음을 잘 표현한다.
- 나의 결핍이 절대 날 떠날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 내 가장 못난 부분까지도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 싸우더라도 늘 애정을 느끼게 해 준다.
2. 나를 믿어준다.
-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지지하고 도와준다.
- 괜히 의심을 하거나, 딴지를 걸지 않는다.
-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지만, 결국 내 선택을 존중한다.
3. 아무리 편해도 무례하게 말하지 않는다.
- 함부로 입거나, 아무 데나 데려가거나, 아무거나 먹이지 않는다.
- 부정적인 말보다는 칭찬을 해주고, 좋은 점을 찾아주고 응원해 준다.
- 나의 편이 되어준다.
- 나를 속상하게 하는 사람들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준다.
- 나를 1순위로 생각하고, 선택에 앞서 나에게 좋은 방향은 뭔지 고려한다.
- 내 기분에 공감해 주고 자상하게 위로한다.
4. 나를 알아가는데 게을리하지 않고, 함께하는 시간에 몰입한다.
- 나와 함께하는 시간 안에서 딴생각을 하기보다 순간의 행복을 느낀다.
- 항상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다.
아주 원하는 것도 많다ㅋㅋ 다 적고 나니, 답이 보였다. 남자친구가 해줬으면 하는 그 행동을 '내가 나에게' 해주면 모든 것이 명쾌했다. 물론 이건 엄연히 '나'에게 맞는 답일 것이다.스스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일단 평소에 내가 무엇을 통해 자존감을 채우려고 했는지 생각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방법이 내가 아닌 타인에게 있다면, 지금껏 타인에게 바라왔던 것들을 적어보자.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내가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본능적으로 곁에 뒀던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해주었는지 정리하다보면,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타인은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고, 또 타인의 행동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 타인을 자존감의 원천으로 두는 순간 우리의 불안은 시작된다. 늘 내 곁에 있는, 아니 있을 수밖에 없는 내가 나에게 좀 더 다정히 대해주는 걸 연습하도록 하자
자, 이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감을 잡았다. 그다음은 근원적으로 내 정신을 잠식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결혼 제도에서 벗어나야 할 차례다. 하지만 아주 솔직히 얘기하자면, 평생을 옳다고 여겼던 명제에서 당장 벗어나는 것은 자신이 없다. 정말이지 머리로는 '결혼은 필수가 아니다.'라는 것을 알겠는데, 내 속에서부터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나의 짝이 있기는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여전히 불안하고, 이 시기를 놓치면 영영 외롭게 살 것 같다는 느낌에 조급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을 더 연구하고 실천하면서 말이다. 서울대를 가는 건, 교과서 중심으로 기초를 단단히 한 이후에 생각해 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