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겨울,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연의 고백 편지 의뢰가 들어왔었다. 세 남성 의뢰인은 모두 데이트 어플로 만난 여성에게 고백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첫 만남을 앞두고 있었다. 아무리 많은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여성에게 고백을 한다는 것이 어쩐지 급하게만 느껴졌다.
상대 여성에 대해 물어봐도, ‘아직 잘 모른다.’라는 대답만 이어졌기에 의뢰인의 마음에 대한 의심마저 들었다. 내용이 없어 가벼운 편지만큼이나 이들의 만남은 가볍게만 느껴졌다. 그들의 고백 편지를 적으며 친구들에게 ‘이게 요즘 연애 트렌드야’라는 자조 섞인 말을 던지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 세 명의 어플남 중 한 명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2년 전, 내 고백 편지로 이어진 여자친구와 이번에 결혼을 하게 됐다며, 혼인 서약서를 대신 써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그 메시지를 보자 창피함이 몰려왔다. 가벼운 건 그들의 관계가 아니라, 내가 가진 편협한 사고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난 2년 간, 서로를 착실히 알아갔고 가까워졌고 평생을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가볍다 무시했던 그 고백이 없었으면, 시작되지도 않을 일이었던 것이다.
최근 혼인 서약서를 의뢰한 또 다른 커플은 SNS로 이어졌다고 한다. 혜원 씨는 동네 야구 모임에서 만난 종국 씨가 눈에 들어왔다.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그리고 씻고 침대에 누운 후에도 종국 씨의 얼굴은 눈앞을 아른거렸고... 혜원 씨는 페이스북에 접속해 밤새 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종국 씨는 혜원 씨의 연락을 내심 반가워했고, 둘은 새벽 내내 심장 두근대는 채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연락을 주고받은 지 한 달, 혜원 씨는 이 종국이 그 종국이 아니라는 것을 종국엔 알아냈다. 한 달 전, 동네 야구 모임에는 박종국이란 이름을 가진 남성이 둘이었고, 두 남자 모두 페이스북에 자신의 사진을 올리지 않았다. 동명이 만들어낸 작은 오해는 혜원 씨의 남편을 뒤바꿨다.
물론, 혜원 씨가 처음부터 이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자신이 한 달간 좋아한 남성은 누군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채팅을 주고받으며 떠올렸던 얼굴은 그 종국이었는데, 설레는 멘트로 날 떨리게 한 남자는 이 종국이었던 것이다. 그 종국이 없었다면, 과연 이 종국에게 설렜을까? 혜원 씨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고, 이 종국에게 이별을 고했다.
종국 씨는 혜원 씨가 좋아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으나,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변함없이 혜원 씨였기 때문이다. 우연이 맺어준 인연을 운명으로 만드는 건, 두 사람의 의지에 달려있었다. 그렇게 종국 씨는 혜원 씨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어플에서 만난 커플도, SNS로 인연이 닿은 커플도 혼인 서약서에 담고 싶은 말은 같았다. 그들은 관계에 대한 책임감을 약속했다. 시작은 가벼웠을지 몰라도 그 책임감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데이트 어플이나 SNS 등을 이용한 새로운 연애 방식은 시대 변화의 산물일 수 있다. 보다 빠르게, 보다 가볍게 시작하는 커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랑은 트렌드가 아니다. 시간이 흘러도, 서로를 향한 신뢰와 책임감이 쌓여가는 사랑의 무게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