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러포즈
최근 드라마 <도시 남녀의 사랑법>를 다시 보았다. 지친 일상을 벗어나 양양 서핑장으로 여행 온 두 남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빠져들었고, 그곳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지금 당장 떠날 용기도, 누굴 만나 사랑할 용기도 없는 내게 이 드라마는 대리만족을 주었지만,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를 다룬 말 그대로 '드라마'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 같은 일이 지구 반대 편에선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간 승민 씨는 어느덧 8년 차 미국 장교로 성장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자, 승민 씨는 휴가를 내고 스페인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승민 씨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아침형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5년 만의 여행이라,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승민 씨는 늦은 시간 진행하는 저녁 투어를 예약해 두었고, 저녁 6시만 되면 숙소로 돌아가 잘 준비를 해야 하는 부모님은 이 일정을 따라오지 못하셨다.
함께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던 승민 씨는 부모님의 만류에 결국 홀로 저녁 투어에 참석했고, 얼마 안 가 부모님께 감사했다. 그 투어에서 나 홀로 여행 중인 아름다운 정화 씨를 만났기 때문이다. 정화 씨는 한국에서 대학 병원 간호사를 하다가 퇴직 후, 훌쩍 떠나왔다고 했다. 자신의 얘기를 하면서 부끄러운 듯 웃어 보이는 그 모습에 승민 씨는 가슴이 설렜다. 두 사람은 다음날도 만났고, 그다음 날도 만났다. 서로 일정을 맞추며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했다. 도파민과 함께한 10일간의 스페인 여행은 눈 깜짝할 새 끝이 났다. 이제는 긴긴 이별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승민 씨는 내게 내일이면 공항에서 헤어지는 정화 씨 손에 자신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쥐어주고 싶다고 했다. 함께한 시간에 대한 감상이 아닌,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는 내용의 프러포즈 편지 의뢰였다. 승민 씨는 사랑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은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무관하게) 상대에게 믿음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삼자인 내가 편지 속 흘러넘치는 감정을 덜어내고, 정화 씨를 설득할 수 있는 이성적인 말로 채워주길 바랐다.
나는 승민 씨의 프러포즈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이 실제로 미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간호사 일을 하던 정화 씨는 미국 이민을 오랫동안 준비해 왔으며, 실제로 미국 간호사 시험에 합격한 상태에서 스페인으로 잠시 여행을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정화 씨가 언제쯤 미국에 가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당분간 두 사람이 장거리 연애를 해야 한다는 것 역시 확실했다.
승민 씨는 이 연애가 가능한 이유를 하나씩 짚으며 정화 씨를 설득하려고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를 적을수록 연애할 수 없는 이유도 새롭게 떠올랐다. 나와 대화를 나눌수록 자신감이 떨어진 승민 씨는 포기하는 게 맞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승민 씨에게, 지금 본인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에 겁내지 말자고 했다. 가끔은 몇 가지 논리적인 근거보다 한 가지 확실한 마음이 더 믿음직스러울 때가 있는 법이다.
하나하나 따지고 들다 보면, 그 사람과 내가 안 되는 이유는 수 만 가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할 이유는 단 하나다. 사랑하니까. 사랑은 비이성적일 때, 오히려 완전할 수 있었다. 내 말을 들은 승민 씨는, 정화 씨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꾸밈없이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편지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선물하기로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편지와 티켓처럼 눈에 보이는 것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 마음만 잘 전해진다면, 정화 씨도 안 되는 이유 수 만 가지를 이겨낼 용기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드라마 같은 두 남녀의 만남 속 클라이맥스에 내가 쓴 프러포즈 편지가 큰 역할을 했길 바라며, 지구 반대편에서 두 사람의 비이성적이고도 뜨거운 사랑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