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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돌연히 Oct 20. 2023

남의 편지에 훈수 두고 싶을 때

편지 대필 작가의 딜레마

30대 초반의 한 남성이 헤어진 여자친구를 붙잡기 위해 편지를 의뢰해 왔다. 둘이 헤어진 이유는 명확했다. 의뢰인이 여자친구 몰래 유흥업소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희대의 연쇄살인마 변호를 맡은 국선 변호사가 된 느낌이었다. 다행히 이별에 대한 여자친구의 태도는 강경해 보였으나, 혹시나 정말로 만에 하나 내가 너무 절절한 편지로 그녀의 마음을 울린다면, 그래서 나의 의뢰인이 감형을 받는다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것도 같다.


의뢰인의 변명은 이러했다. 성인이 되고부터 단 하루도 제대로 쉰 적 없이 일을 했고, 유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고 한다. 2년 적금 만기 날, 의뢰인은 같은 적금을 들었던 직장 동료와 자축의 술자리를 가졌고, 취한 채로 노래방을 갔을 뿐이란다. 그곳이 유흥업소인지 알지 못했으며, 그 안에서의 일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말로만 들었던 '심신 미약' 상태였다.


여자친구는 남자가 유흥업소에서 쓴 금액을 보고, 더 격하게 반응했다. 평소 남자가 엄청난 짠돌이였던 것이다. 남자는 내게 '너와의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평소 돈을 아꼈다'는 내용으로 호소문을 적어달라 요청했다. 의뢰인의 편에 서서 편지를 쓰면서도 비밀 메시지(세로 드립)로 훈수를 두고 싶다는 욕구가 올라왔다. 예를 들면, 이렇게.


저히 이렇게 널 놓칠 수 없어. 넌 정말 내 삶의 전부였으니까.

쳐버린 우리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면, 난 어떤 것도 다 할 수 있어.

엾게 여겨줘. 이런 날 다시 한번만 믿어줘. 내가 잘할게.




내게 공범이 되어달라 부탁하는 남자도 있었다. 이 남자 역시 헤어진 연인을 붙잡고 싶어 했는데, 내게 의뢰한 편지는 일반적인 재회 편지가 아니었다. 남자는 여자친구를 붙잡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연애할 때 적어놨던 편지를 우연히 발견해서 보낸 것처럼 연기할 계획을 세워둔 것이다. 이 깜찍한 사기 행각을 위해, 내게 연애초에 적었을 법한 내용으로 편지를 적어달라 부탁했다. 


그가 내게 설명해 준 시나리오는 이러했다. 100일 기념으로 제주도의 한 호텔에 묵게 된 두 사람, 여자는 피곤해 먼저 잠이 든다. 팔베개를 한 채 여성이 잠들기 기다렸던 남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에 있는 테이블에 앉는다. 그곳에 놓인 메모지 위로 여자친구를 향한 사랑 고백을 밤새 적어간다. 제주도 바다를 바라보면서 남자는 다짐한다. 앞으로 우리 사이에 파도가 치더라도, 오늘을 기억하며 버티자고.


남자는 해당 호텔에 연락해, 메모지를 공수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니, 메모지 안에 적을 수 있도록 너무 길지 않은 연애편지를 부탁했다. '아니, 이 머리로 제대로 된 사과를 해보는 게 어떨지.'란 생각이 들었지만, 훈수두기엔 너무 진지하고, 들여다보면 또 애잔한 내 의뢰인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나와 어떤 이유로든 인연이 닿은 이 사람들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편지 대필 작가로서 겪는 첫 딜레마였다. 사과받지 못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편지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길 바랐다. 그렇게 나는 의뢰인의 감형을 위해 열혈 변호사가 되기도, 절실한 사기 행각의 공범이 되기도 하면서 편지를 써 내려갔다.


어느새 나의 의뢰인들이 무사히 '이별 유예'를 받길 바라는 나를 발견한다. 어떤 선고를 받았는지 끝내 알 수 없는 것이 편지 대필 작가의 숙명이지만, 이내 몰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정들어버린 내 의뢰인들이 어디선가 교화(?)된 채로 예쁜 사랑을 하고 있진 않을까- 상상하며 미소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나와 편지를 쓰면서, 진정한 내면의 성장을 겪었길 마음 깊이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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