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재수학원에서 만난 친구 박의 연애 상담을 도맡아 하면서부터였다. 스물한 살, 박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솔 탈출에 성공했다. 대부분의 초심자들이 그렇듯, 박은 자신 앞에 펼쳐진 수많은 선택지들에 겁을 냈다. 그리고 그녀는 재수학원 친구들이 모인 단톡방에서 답을 구하려 들었다. 데이트 비용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커플 용품은 언제쯤 맞추는 것이 좋을지 등의 시시콜콜한 내용이었다. 우리는 박의 첫 연애를 응원하며, 그녀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들을 함께 골랐다. 그러나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렇듯, 우리는 점점 그녀의 연애 상담이 지겨워졌다.
‘이제는 좀 알아서 해도 되지 않겠니, 이게 아바타 연애도 아니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어느 날이었다. 어느새 연애 6개월 차에 접어든 박은 남자친구와의 이별을 택했다. 처음으로 오롯이 박 혼자 내린 결정을 들으며, 우리는 내심 생각했던 것도 같다. 드디어 끝이다...라고. 박의 상상초월 마지막 부탁이 있기 전까지 말이다.
‘ 나 대신, 이별 카톡 좀 적어줘. 깔끔하고, 안전하게. 아련하지만, 미련은 안 남게.’
그렇다. 박은 박이었다. 어떻게 이별을 말해야 할지 몰라서 연락을 피하고 있는 박보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왠지 내 전남친인 것만 같은 그 남자가 더 신경 쓰였다. 그렇게 처음으로 누군가의 이별 카톡을 대신 써주게 된 것이다. 박의 주문대로 감성 가득 문구로 그 남자를 위로하면서도,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납득시켰다. 내 덕에 무사히 첫 연애를 끝낸 박은 내게 말했다.
너 이걸로 사업해도 되겠는데?
머쓱함에서 나온 농담이었는지, 편지 대필 사업의 가능성을 꿰뚫어 보고 말한 진심이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건 그 말이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는 것이다. 몇 년 뒤, 일반인들도 자신만의 서비스를 판매할 수 있는 재능 판매 사이트(크몽)의 존재를 알게 된 날, 박이 했던 그 말을 바로 떠올린 걸 보면 말이다. 박처럼 자신의 감정 혹은 생각을 글로 풀어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고, 편지 대필을 해보면 어떨까 떠올렸다.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른 사업처럼 초기 비용이 따로 드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편지 대필 서비스를 등록한 2021년 8월 시점에는 이미 발 빠른 글쟁이들로 인해 비슷한 서비스가 넘쳐흐르는 때였다. 사이버 파리만 날리는 내 서비스였기에 판매를 반쯤 포기하고 있을 때 첫 메시지가 왔다.
안녕하세요. 고백 편지 의뢰드립니다. 제가 해야 할 게 있을까요?
그래 몇 년 전, 내 손으로 한 커플을 깨뜨렸으니 이번에는 이 커플을 붙여서 업보를 청산하리라. 성심성의껏 상담 후, 정성스럽게 고백 편지를 적어줬다. 의뢰인은 매우 좋아하며, 별점 5점과 함께 리뷰를 남겨줬다. 그 리뷰를 본 많은 사람들은 내 서비스를 너 나 할 거 없이 찾았다.
는 상상에 기분이 좋아졌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또 두 달간 잠자코 다음 의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반응도 없는 그 서비스를 꾸준히 붙잡고 있었다는 것이 참 기특하다. 반응이 없으면 쉽게 시시함을 느끼곤 하는 나였는데, 이상하게도 이건 그렇지 않았다. 잊을만하면 울리는 크몽 알람이 반가웠던 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매일 출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의 의뢰 내용을 읽곤 했는데, 이리저리 치이는 만원 지하철이었지만, 타인의 삶에 푹 빠진 그 순간만큼은 내가 속한 시공간이 뒤바뀌었다.
10년 전 멀어진 친구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기도, 감옥에 있는 애인에게 연애편지를 보내기도, 학교폭력 가해자 부모에게 경고 편지를 보내기도,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여성에게 프러포즈 편지를 보내기도 하면서 나는 그 어느 곳에도 그 어느 때에도 존재했다. 무수한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를 듣고 진심을 전달하다 보니, 2년이 지났다. 크몽에서는 어느새 400건이 넘는 누적 판매를 기록했고, 판매 수익도 자연스레 늘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 쉽게 꺼내지 못한 마음들을 드러냈다.
내가 의뢰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나눴던 그 삶을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들어 보고 싶어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의뢰인들의 사적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잘 숨기고, 섞고, 두루뭉술한 표현들로 실제인지 소설인지 헷갈리게 하는 글이겠지만, 내 모든 편지가 그러했듯 누군가의 진심이 독자에게 가 닿길 바라며 적을 생각이다. 우리 모두의 진심이 당신에게도 전달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