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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돌연히 Oct 18. 2023

누가 편지를 돈 주고 사?

편지 대필을 맡기는 사람들의 심리

누가 편지를 돈 주고 사? 편지 쓸 시간도 아까워하는 건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퀴즈 하나를 들고 왔다. 


Q. 지난 2년간,  나에게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한 의뢰인의 나이, 직업, 성별은 무엇일까?


정답은 20대 초반의 여대생이었다. (돈은 많은데 시간이 없는 사람을 떠올렸다면, 의외의 답이지 않은가) 22살 대학생 정은이는 이제 막 썸을 타기 시작한 남자가 있었다. 문제는 그 남자가 만난 지 3일 만에 군 입대를 했다는 것인데, 훈련소에 있는 동안 둘을 이어주는 ‘유일한 썸수단’이 바로 편지였던 것이다. 정은이는 이제 막 시작되어 애끓는 마음을 전부 드러내지는 않지만, 상대방에게 기다릴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 싶어 했다. 나는 귀여운 두 청춘의 사랑, 그 시작을 같이 할 수 있음에 기분이 좋았다. 정은이의 사랑 고백이 담긴 편지를 대필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정은이는 답장을 받았다며, 내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편지엔 ‘정은아, 너는 공대생이면서 어쩜 그렇게 글도 감성적으로 쓰니. 넌 정말 완벽한 내 이상형이야.'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정은이는 나를 끊을 수 없게 되었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이 연애에서 큰 매력으로 통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 특수한 상황에 놓인 정은이는 훈련소로 보내는 실물 편지부터 인터넷 편지까지 20여 통에 이르는 편지를 전부 나와 함께 적었다. 훈련소 수료식에서 전할 마지막 편지를 적은 뒤, 나와 정은이는 후련한 끝인사를 나눴다.

























마치 곰신 동기처럼 일종의 동지애가 느껴지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끝이 난 줄 알았으나...


정은이의 연락은 멈추지 않았다.


정은이는 ‘썸남’에서 ‘남친’으로 호칭이 바뀐 남자와 썸원이라는 커플 어플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루에 한 개 공통 질문이 뜨는 어플인데, 상대방의 답을 보기 위해서는 50자 이내의 답을 적어야만 했다. 그 짧은 문장을 적기 위해 나에게 다시 의뢰를 시작한 것이다. 대화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정은이가 매우 좋은 대학교에 다니는 수재라는 것인데, 내게 보내준 초안 자체도 큰 문제없는 완전한 문장이라는 것을 미루어보아 그녀의 글쓰기 능력도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은이가 돈을 지불해서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전히 누가 편지를 돈 주고 사? 편지 쓸 시간도 아까워하는 건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건, 내가 만난 대부분의 의뢰인들은 정은이처럼 오히려 성의가 넘쳐나는 쪽에 속했다는 점이다. 상대에게 더 많이 주고 싶어서, 혹은 정제되지 않은 글로 부담을 주기 싫어서 나를 찾았다. 나에게 지금 처한 상황과 감정, 꼭 넣고 싶은 내용 등을 정리해서 적어 보내는 것 자체가 많은 시간이 필요한 행위이기에, 그들이 시간을 아까워한다는 전제도 옳지 않다. 하지만, 정은이와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이는 지금껏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나는 돈을 받고 무엇을 팔고 싶지?     


긴 고민 끝에 나는 내가 하는 편지 대필이 의뢰인들의 마음을 담는 그릇을 골라주는 일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전하고 싶은 마음이야 호수만 하지만, 이 세상 편지지는 손 한 뼘 크기이지 않은가. 한정된 분량의 그릇 속에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도록 마음을 꾹꾹 눌러 담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의뢰인들의 사연을 들으며, 그 마음을 담기에 가장 어울리는 형태의 그릇을 빚는다. 화려하거나 소박하거나 크거나 작은 그 그릇에 의뢰인들은 각자 다른 것을 담는다. 누군가는 '상대방과 이어질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누군가는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욕구'를, 누군가는 '희망'을 담았다.       


그러나, 정은이는 담을 수 없는 것을 원했다. 자신만으로는 채우지 못하는 남자친구의 '이상형'에 가까워지기 위해 돈을 지불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내가 어떤 그릇을 빚더라도, 이 형태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이 그릇으로는 상대방에게 정은이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정은이를 만나면서, 나는 이제 어떤 의뢰를 거절해야 할지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정은이에게 더 이상 편지 의뢰를 받을 수 없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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