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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돌연히 Oct 20. 2023

내일 당장 눈이 안 보인다면, 나는 오늘 편지를 쓰겠어

20대 후반의 학생 회장 은성이는 1년 전, 신입생 환영회 때 본 긴 생머리의 연지에게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연지를 만나기 전, 학생 회장 선거에서 내건 #연애_금지 공약 때문이었다. 워낙 학생들 간 교류가 많은 예술대였기에 학생 회장의 역할은 더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아는 은성이는 연애를 하지 않겠다! 선포한 것이다.   


그렇게 학생 회장의 책임감으로 꽁꽁 숨겨놨던 마음을 풀어헤치게 된 건, 은성이가 자신의 눈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각막에 손상을 입은 은성은 눈 수술을 앞두고 있었고, 이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은성은 연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한다.


은성이가 내게 보내준 초안에는 미안하다는 말로 가득 차 있었다. 널 좋아해서 미안하고, 그 마음을 제때 표현하지 못해서 미안하고, 이렇게 수술을 핑계로 말하게 된 것이 미안하고, 또 수술을 앞둔 상태에서 부담을 준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만큼 미안한 일도 많아지는 것 같았다.  


그 미안함을 안고서라도, 은성이는 고백하기로 했다. 지금도 네가 너무 보고 싶고, 눈이 멀어서 앞을 못 보게 되더라도 항상 널 기억할 것이라 말했다. 은성은 내일 당장 눈이 안 보일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남기기를 선택했다.




큰 수술을 앞두고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은성이와 달리, 마흔을 앞둔 호석 씨는 죽음의 문턱을 밟고 온 날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호석 씨는 여느 때와 같이 퇴근 후, 차를 타고 귀가 중이었다. 뒷좌석에는 딸 소윤이를 위한 선물이 실어져 있었다. 소윤이가 좋아할 상상을 하며 웃음 짓는 그 순간, 옆 차선 트럭이 호석 씨의 차를 들이받았다. 뒷좌석에 실린 선물이 차 창문을 깨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선물을 보며, 호석 씨는 식은땀이 났다. 운 좋게 목숨을 건졌지만, 그날 밤 소윤이에게 약속한 선물은 줄 수 없었다.


호석 씨는 그 사고를 통해 죽음이 바로 자신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길로 사망 보험에 들었고, 5살 딸 소윤이를 위한 편지를 의뢰했다. 만약 자신이 죽게 된다면, 이 편지는 사망 보험금과 함께 소윤이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했다. 무사히 살아서 소윤이의 결혼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이 편지를 결혼 선물과 함께 전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하나뿐인 딸에게 남기는 편지를 어떻게 써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죽음에 가까이 간 적도, 생때같은 딸을 낳아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편지 한 통을 남길 수 있다면, 어떤 말을 적을까 떠올리면서 한 자 한 자 마음의 무게를 담아보려 노력했다.     


하나뿐인 나의 딸 소윤이에게

소윤아 아빠야. 오늘 밥은 잘 먹었니? 어젯밤 잠은 잘 잤고? 너의 안부를 물으려니, 결국 중요한 건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소윤이가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뿐이야. 아장아장 걸으며 아빠!라고 외치던 그날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소윤이 너는 어느새 쑥쑥 커서 온 집안을 뛰어다니는 말괄량이 어린이 5살이 되었구나. 네가 너무 빨리 자라는 것 같아서, 흐르는 시간을 멈추고 싶을 때가 자주 있단다. 실제로 시간을 돌릴 수는 없으니, 나는 하루하루 커가는 우리 소윤이의 모습을 눈으로, 마음으로 담으려고 애써. 네 모든 모습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면서 말이야.

나는 그렇게 널 기억하고, 아끼고, 사랑했단다. 만약 편지를 읽고 있는 네 곁에 내가 없더라도 이거 하나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지금도 나는 네 하루를 기억하고,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멀리서 널 응원하는 내가 있다는 것이 소윤이 네게 큰 힘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지금 소윤이는 어떤 꿈을 꾸는 사람이 되어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꼭 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야. 다만 네가 향하는 그 길이 꼭 너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었으면 좋겠구나. 그게 내 작은 바람이고, 내가 남긴 이 보험금이 네가 걷는 그 길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지금 소윤이 네가 ‘무슨 보험금?’이라고 되묻는다면, 아마 내가 오늘날까지 무사히 살아서 네 곁을 지키고 있단 뜻이겠지. 그리고 우리 소윤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이고. 아빠는 벌써 그 운 좋은 신랑이 누군지 질투가 난다. 아빠가 참 주책이지. 그래도 언제나 그랬듯 나는 네 선택을 지지하고 온마음 다해 응원할 거야. 그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소윤이를 닮은 예쁜 아이를 낳는다면, 그제야 네가 내 마음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에게 주었던 이 사랑만큼, 충만한 사랑으로 가정과 아이를 잘 키워나갈 것이라 믿는다.

(생략)


두 사람은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들을 편지에 담았다. 시간이 흐르면 흩어지고 바래질 '지금'의 감정을 글자로 멈춰 세웠다. 이렇듯, 감정을 생동감 있게 보관할 수 있다는 점이 편지가 가진 매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꼭 특별한 경험을 해야지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렸으면 한다. 그저 '지금' 막 떠오른 사람이 있다면, 주저 없이 편지지를 꺼내 들고 일상의 소중함과 애틋함을 전해보자.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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