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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도리 Sep 22. 2022

겨울비가(悲歌)

    



겨울이 좋은 이유를 열 가지도 넘게 꼽을 수 있지만, 겨울이 싫은 한 가지 이유가 나머지를 다 이겼다. 춥다. 왜 하필 나는 항온 동물로 태어나, 사계절 다채로운 이 나라에서 적정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는가. 태생적으로 추위에 강한 사람들은 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경다발을 타고 냉기가 전류처럼 흐르는 괴로움을.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여동생은 나와 정반대의 체질을 지녔다. 차력사도 아닌데 한겨울에 코트도 없이 외출하는 기행을 일삼았다.


최후의 낙엽이 떨어질 때쯤이면 슬슬 불안해진다. 올해는 또 어떻게 견디나. 나는 휴대폰 메인 화면에 날씨 앱을 끌어다 놓고, 야쿠츠크라는 도시를 기본값으로 설정해 놓는다. 러시아 북동쪽 어디쯤이라는데, 그곳에서는 한파로 휴교령을 내리는 기준이 -55℃라 한다. 아마 죽기 전까지 가볼 일은 없을 것이다. 찌뿌둥한 겨울 아침, 오늘의 날씨를 확인하면 그곳의 현재 기온은 대충 -40℃ 언저리를 오르내린다. 서울은? 기껏해야 -10℃. 그곳 사람들은 이 정도 날씨는 겨울로도 안 치겠지? 덥다고 반소매로 다니는 거 아냐? 이런 상상을 하면 어쩐지 조금 대범해지고, 용기가 불끈 솟는 것이다. 관념론의 위대함이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겨울은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겠지만, 기억 속의 체감온도는 지금보다 두 배쯤 더 혹독했다. 고작 40여 년 전인데, 지구의 절대온도가 지금과 크게 달랐을 리는 만무하고, 아마 추위를 막을 방패가 지금보다 열악했기 때문일 것이다.


추우면 털갈이 짐승처럼 두꺼운 옷을 입는 것 외에 별 대책이 없었다. 엄마는 장롱 서랍에서 내복부터 꺼냈다. 꽃무늬가 프린트된 빨간 내복은 마치 동절기용 살갗이 새로 돋은 것처럼 초겨울부터 늦은 봄까지 내 몸에 줄창 붙어 있었다. 할머니가 '도꾸리'라 부르던 터틀넥 스웨터와 엠보싱으로 누빈 솜바지, 뽀글뽀글한 후리스 안감이 붙은 아크릴 오버코트 같은 것이 나의 고정된 겨울 유니폼이었다. 가끔 양말을 두 겹으로 겹쳐 신기도 했다. 방수도 방한도 되지 않는 헝겊 운동화를 신고 밖에서 뛰어놀려면 별 수 없었다.


실내라고 그닥 따뜻하지도 않았다. 마루는 말할 것도 없고, 웃풍때문에 방에서도 코가 시렸다. 그나마 넓지도 않은 방이 아랫목과 윗목으로 선명하게 나뉘었다. 아궁이의 열기가 직접 도달하는 아랫목은 오래 누워 있으면 등짝에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웠지만, 열원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온기는 그라디에이션을 그리며 조금씩 옅어졌다. 윗목에서는 발이 시려 맨발로 딛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아랫목이 천당이라면, 윗목은 얼음 지옥 정도에 해당하겠다.


유일한 연료는 연탄이었다. 부잣집에서는 기름으로 보일러를 돌린다는 풍문이 있었지만, 내가 아는 기름은 할머니가 피같이 아끼는 식용유와 명절 때 손님이 들고 오는 옥수수유가 전부라서, 그걸로 부침개도 아니고 방을 데운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헛소리 같았다. 집집마다 첫 번째 월동준비는 연탄광을 채우는 일이었다.  


우리 동네 연탄은 '동기네 연탄가게'가 독점이었다. 연탄이 간당간당하면 할머니는 나를 심부름 보냈다. 동기 엄마한테 연탄 좀 보내라고 해라. 동기는 연탄가게 주인의 아들이었다. 어른들은  동네 강아지를 부르듯 너도 나도 동기네라 불렀지만, 사실 동기는 서른 살도 넘은 노총각이었다. 언제 보아도 얼굴 어딘가에 검은 연탄 자국이 묻어 있었다. 한 번은 길에서 그와 마주쳤는데 나도 모르게 ‘앗! 동기다!’ 소리를 질렀다가 크게 혼쭐이 난 적도 있었다.       


겨울이 오면 동네에서 동기네가 제일 바빴다. 리어카 가득 연탄을 싣고 종일 동네를 활보했다. 연탄이 들어오는 날에는 괜히 마음이 설렜다. 먹을 것도 없는데 어쩐지 잔칫날처럼 기분이 들떴다. 연탄 리어카가 도착하면 녹슨 철대문이 삐걱삐걱 앓는 소리를 내며 꼭대기 걸쇠까지 활짝 열리고, 대문에서 연탄광까지 신문지가 깔렸다. 동기네 가족은 인간 도미노처럼 늘어서서 릴레이 바통을 넘기듯 연탄을 날랐다. 이런 날이면 나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가는 것도 관두고 마당에 앉아 구경을 했다.


동기네 가족이 연탄을 나르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신기했다. 그들은 연탄을 한 번에 두세 개씩 겹쳐서 던졌다. 탄력이 붙으면 심지어 사람을 보지도 않고 던졌다. 허공을 비행하던 연탄은 마치 접착제라도 붙인 것처럼 서로 달라붙어 다음 사람의 손에 똑떨어졌다. 일하는 사람은 태연한데, 구경하던 나만 손에 땀을 쥐며 움찔거렸다. 나는 은근히 기대했다. 300장이나 되는데, 적어도 한 번은 박살 나겠지. 금방이라도 재미나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마음이 두근거렸지만, 내 바람과 달리, 그 많은 연탄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연탄은 다루기 힘든 상대였다. 따뜻한 사랑을 갈구하는 연인에게, '너 하는 거 봐서!'라고 코웃음을 치는 마성의 애인과도 같았다. 난폭하게 다루면 깨지기도 잘했고, 관심을 거두면 금세 싸늘해졌다. 한결같은 온기를 약속하는 것도 아니다. 새로 연탄을 갈면 방바닥은 미지근했다. 오슬오슬 한기가 드는 날, 뜨끈한 바닥에 등을 지지고 싶어도 방금 연탄을 갈았다면 별 수 없다. 기다리는 수밖에. 급한 마음에 불구멍을 활짝 열었다가는 뒷감당이 어렵다. 기나긴 겨울밤, 한 장의 연탄에게 할당된 러닝타임이 있는데,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방만하게 굴었다가는, ‘하얗게 불태웠다’는 유언을 남긴 채 연탄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산화했다. 월초에 가불 받아 소고기를 사 먹고, 남은 날은 굶어 죽는 한량의 처지가 되는 것이다. 원시인이 불씨를 다루듯, 세심하게 불구멍을 조절하며 중용의 도를 실천하는 것이 연탄을 대하는 현명한 처사였다.


구들장 아래가 불의 영역이라면, 장판 위쪽은 열의 영토였다. 냉혹한 겨울에 일말의 따스한 추억이 있다면 그것은 아랫목에 깔린 온기 덕분이다. 아랫목은 차가운 겨울왕국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눈보라가 총알처럼 빗발치는 전장에서 몸을 숨길 수 있는 든든한 방공호였다. 아랫목의 본질은 따뜻함이기에,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도록 거기에는 늘 담요가 깔려 있었다. 겨울밤, 식구들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시린 손을 비비며 이불속에 손발을 밀어 넣었다. 구멍 뚫린 신발 속으로 젖은 눈이 스며든 날에도, 뜨끈한 아랫목에 발을 담그면 꽝꽝 얼었던 발가락에 간질간질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겨우내 펴놓은 탓에 이불을 펄럭일 때마다 먼지가 풀풀 날렸지만, 천식이나 비염도 없이 자라난 것을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아귀가 맞지 않아 바람이든 빗물이든 심지어 온갖 날벌레들조차 출입이 자유로운 그 너그러운 창문이, 자욱한 먼지 속에서도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게 해 준 일등공신이었을 것이다.   


겨울방학이면 사촌 언니들이 놀러 와 개학하기 전까지 머물 때가 많았다. 아랫목의 이불은 만남의 광장이자, 겜블러의 하우스였다. 우리는 담요 속에 발을 넣고 둥글게 앉아, 이불을 카지노의 테이블 삼아 원카드를 하거나 민화투를 쳤다. 진 사람은 이불 위로 엎어지고, 이긴 자들은 엎드린 자의 등에 김연경 선수의 강스파이크에 맞먹는 파워로 인디안밥을 먹였다. 밤이면 똑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아 전설의 고향을 단체 관람했다. 결정적인 순간이면 심약한 쫄보들은 이불속에 머리를 묻고 괜히 소리만 빽빽 질러댔다.        




우리 집은 막다른 골목에 있었다. 앞집과 옆집까지 세 집이 삼각형을 이루며 길이 끝났다. 대문은 세 개였지만, 거주하는 세대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어느 집이나 세입자를 들였기 때문이다. 허름하다는 점은 같았지만 가옥의 형태도 제각각이었다. 앞집은 세 놓기 좋게 방과 부엌이 독립된 문간방이 있었고, 우리 집에는 마당에서 철계단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옥상 방이 있었다. 옆집에는 마루와 마당 양쪽으로 문이 뚫린 희한한 방이 있어, 거기에서도 누군가 세를 살았다. 옆집 아저씨는 큰 아들이 장가를 가면 아들방에도 사람을 들일 거라고 했다. 어쨌거나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맥없이 놀리는 법은 절대 없었다.  


옆집 문간방에는 전 씨 아저씨 내외가 살았다. 전 씨 아저씨는 전국을 떠돌며 일을 하는 통에 한번 집을 나가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빈 방은 아줌마 혼자 지켰다. 전 씨 아줌마는 엄마보다 훨씬 늙었고, 할머니보다 약간 젊었다. 아저씨가 전 씨라서 할머니는 아줌마를 전 씨 마누라라 불렀다. 일곱 살이었던 나는 차마 그렇게 부르지 못하고, 얼렁뚱땅 전 씨 아줌마라 호칭을 정리했다. (지금 생각하니 은근 아메리칸 스타일의 칭호가 아닌가.) 어른들의 뒷공론에 따르면 정식 부부는 아니고, 혼자 살던 아저씨가 어느 날 이모뻘은 되어 보이는 여자를 데려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늙은 여자가 염치도 없이 젊은 남자한테 찐드기를 붙었다며, 동네 사람들은 은근히 아줌마를 따돌렸다. 가끔 시장에 갈 때를 빼고, 아줌마는 방안에 박혀 골목으로 나오는 일이 적었다.  


어느 날 옆집 대문이 열리더니 전 씨 아줌마가 골목에서 놀고 있던 나를 불렀다. 방에 맛있는 것이 있는데 같이 먹자는 것이다. 먹을 것을 사양할 정도로 체면을 중시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나는 두말없이 아줌마를 따라갔다. 그 방에 들어가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거기는 깜짝 놀랄 만큼 좁았다. 우리 집도 좁기는 마찬가지지만, 그 방에 비하면 벌판이었다. 이 좁은 곳에서 어른 둘이 어떻게 잠을 잘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원래 방이 좁았던 건지, 아니면 사방 벽을 따라 늘어선 살림살이들 때문에 운신할 공간이 줄어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줌마는 찬장에서 호떡 하나를 꺼내 주었다. 내가 호떡을 먹는 동안, 아줌마는 옆에서 혼자 중얼중얼 이야기를 시작했다. 호떡에 정신이 팔려 내 귀에는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차피 일곱 살 꼬맹이에게 경청을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족 아닌 사람이 먹을 것으로 유인하는 전형적 위기 상황에도, 경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의 천진함이 마음에 들었던지 아줌마는 말하는 중간중간 내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날 이후 전 씨 아줌마는 종종 골목에서 놀고 있는 나를 방으로 불러 캐러멜이나 센베이 같은 것을 쥐어 주었다. 내가 과자를 씹으며 어디 만화책이라도 없는지 요리조리 눈동자를 굴리는 동안, 아줌마는 곁에서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먹을 것이 떨어지면 발딱 일어나 골목으로 돌아갔다.


가끔은 아줌마가 부르지 않아도 내가 먼저 아줌마를 찾기도 했다. 일 나간 엄마가 돌아오려면 한참이나 멀었는데, 유난히 배가 고프고 입이 심심한 그런 날이었다. 나는 숨겨 놓은 꿀단지를 꺼내듯 옆집 대문을 넘어가 슬그머니 방문을 두드렸다. 내가 문간방 안쪽으로 고개를 쏙 내밀면, 아줌마는 언제나 반색을 하면서 찬장을 뒤졌다.


줄 것이 마땅치 않은 날이면 접시에 백설탕을 덜어 주었다. 어둑어둑한 방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하얀 가루가 실처럼 쏟아지는 풍경은 아슬아슬하면서도 기막히게 아름다웠다. 가는정백당. 설탕 봉지에 적힌 글씨를 보며, 나는 그 말이 ‘정이 가는 사람에게 주는 설탕’이라는 뜻이 아닐까 제멋대로 해석했다. 어른들이야 뭐라든 아줌마는 내게 늘 다정했으니까.


나는 그 매혹적인 가루를 조금씩 혀 끝으로 핥아먹었다. 설탕은 명백하게 달콤했다. 도나스나 뻥튀기도 맛있지만, 설탕의 매력은 차원이 달랐다. 내 미각세포는 단도직입적이고, 가차 없는 그 정직한 단맛에 뿌리까지 온전히 흔들렸다. 같이 놀던 아이들이 엄마의 호출에 하나둘 사라지고 익숙한 서글픔이 밀려드는 저녁나절에도, 백설탕 한 숟가락을 입에 물고 침으로 녹이면, 정의할 수 없는 감미로움이 목 너머로 살금살금 흘러내렸다. 할머니도, 엄마도 내게 설탕을 주지는 않았다. 나 같은 조무래기에게 속 얘기를 털어놓는 어른도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쾌쾌한 체취가 엄습하고, 발 디딜 틈 없이 잡동사니가 나뒹구는 그 방에서, 어쩐지 서글퍼 보이는 늙은 여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래도록 단맛에 취했었다.


겨울의 한기가 아직 기승을 부리던 어느 아침, 골목 안이 크게 웅성거렸다. 뭔가 큰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곧이어,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온 전 씨 아저씨가 등에 아줌마를 엎고 마당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아줌마의 팔다리를 주무르는 동안, 옆집 아줌마는 황급히 동치미를 퍼왔다. 하지만 부질없었다.


아줌마가 일부러 연탄아궁이를 열어놓은 것인지, 아니면 겨울마다 심심찮게 신문 단신에 등장하는 사건사고처럼, 갈라진 방구들로 죽음의 냄새가 스며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경찰차 한 번 다녀가지 않고 요란한 곡소리도 없이, 그 일은 슬그머니 마무리되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막다른 골목에는 이내 고요한 냉기만 가라앉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전 씨 아저씨는 이사를 갔고, 그 방에는 한동안 사람이 들지 않았다.      


나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가여워서 어쩌냐면서 마음 여린 엄마가 눈물을 훌쩍이는 것을 보고서야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첫 번째 죽음이었을 것이다. 아는 사람의 죽음이 유발하는 공포와 절망을 해석할 만큼 인지가 발달되기 전이었기에, 기억 속의 나는 엄마처럼 울지 않았다. 내게 단것을 내어 주고, 그 옆에서 가재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어느 꼬맹이의 이야기를 반복했던 그녀를 이제 다시는 볼 수는 없다는 것만 겨우 알아챘을 뿐이었다.


나는 아줌마가 아니라 연탄에 대해 생각했다. 혹한이 몰아쳐도 온 식구가 기댈 곳은 연탄 한 장의 온기뿐이었다. 동기네 가족이 싣고 온 연탄은 겨울철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나는 축복이라 믿었던 존재의 이면에 이토록이나 헤아릴 수 없는 비정함이 숨어있었다는 것에 전율했다.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도, 파멸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에도.      


한해살이들은 덧없는 생을 마감하고

다년생 생명체들은 칩거의 동굴을 물색하는 계절.

시베리아 어디에서 북극의 바람이 불어오면,

은밀하게 하강하는 수은주처럼

내 마음에는 어느덧 겨울의 우울이 스며든다.       



* 이미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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