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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도리 Jul 13. 2022

세기말 일본식 돈가스




최초의 아르바이트는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나라 밖 여행이 드물던 20세기 말.


장소는 명동의 유명한 돈가스집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다루는 일이라 막무가내로 신이 났다. 인간의 탈을 쓴 자라면 돈가스에 열광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편견이 확고하던 시절이었다. 더하여, 내 손으로 돈을 다 번다는 사실이 호들갑스러운 감격에 불을 붙였다.   


첫날에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것은 내가 알던 돈가스와 많이 달랐다. 오뚜기 수프와 마카로니 샐러드가 곁들여진 경양식집의 돈가스를 상상했는데, 처음 보는 일본식 돈가스는 레시피도 플레이팅도 전혀 딴판이었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밥으로 드릴까요, 빵으로 드릴까요' 묻지 않았고, 심지어 수프 대신 된장국이 딸려 나왔다. 엄연한 (경)양식 요리에 된장국이 웬말인가! 스테이크를 쌈장에 찍어 먹으라는 것처럼 해괴한 조합이었다. 백 번 양보해서 굳이 된장국이어야 한다면 호박, 버섯, 풋고추, 우거지 같은 것을 넣고 맛깔나게라도 끓일 것이지, 커다란 국솥에는 건더기라고 해봐야 다진 두부와 물미역이 전부인 허탈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국자로 휘젓기 전까지 된장 포함 모든 재료가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이를테면 항상 기분이 다운된 비관론자 같은 비주얼의 국이었는데, 이름만은 상큼하게 ‘미소’였다. 근사한 곳으로 외식을 하러 간다는 말을 ‘칼질하러 간다’로 에둘러 표현하던 당대의 정서를 고려했을 때, 칼질이 필요 없도록 미리 고기를 잘라서 내오는 주방의 배려도 어쩐지 조금은 눈치 없는 자의 과잉 친절로 느껴졌다.  반달을 버리고 정육면체로 변신한 단무지의 파행과, 마요네즈를 밀어낸 비장의 샐러드 소스까지, 전위적 작가의 콜라주처럼 익숙한 소품들이 묘하게 낯설었다.


하지만 그것은 촌닭 같았던 나만의 이질감이었고, 알고 보니 그곳은 소문난 맛집이었다. 명동 한 복판에서 3층짜리 건물을 몽땅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매출에는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다. 과연 끼니때가 가까워지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손님들이 밀어닥쳤다. 층마다 네다섯 명의 알바가 대기했고, 음식 전용 엘리베이터는 1층 주방에서 조리된 요리를 건물 꼭대기까지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마음으로 얼떨결에 시작한 일이었는데, 출근카드를 찍고 나면 친구랑 잡담 한마디 나눌 겨를도 없었다. 남의 돈 버는 일은 뭐하나 쉬운 게 없다는 어른들 말씀이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실감한 시간이었다.

 

종일 무거운 접시를 들고 종횡무진 테이블을 누비고 나면, 종아리는 팍팍하고 손목은 시큰거렸다. 동시다발적으로 빗발치는 손님들의 요구사항을 기억하고자 신경은 늘 팽팽하게 날이 섰다. 붙박이 점원과 나 같은 뜨내기가 뒤섞인 홀에서 책임 매니저는 유독 알바생에게만 가혹하게 굴었다. 일러준 매뉴얼에서 뭐라도 어긋나면 귀신같이 지적하며 망신을 주었고, 가끔은 다른 사람의 실수조차 막내인 나에게 뒤집어 씌웠다. 그곳에서 나는 억울한 소리를 듣고도 싹싹한 얼굴로 대꾸하는 경증 자아분열을 경험하기도 했다.  

 

매니저의 타박에도 인이 박힐 무렵, 마음의 고뇌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곳의 대표 메뉴는 히레가스, 로스가스, 생선가스. 그것들은 5500원 혹은 6000원이었다. 가스 삼총사 위에 끝판왕처럼 군림하는 (그 이름도 럭셔리한) 코돈부르는 채소와 치즈를 품은 돈가스였는데, 그건 무려 8000원이었다. 시급 1500원의 내 일당은 7500원. 서빙을 할 때마다 환산식을 품은 초등학교의 함수 상자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로스가스는 220분,

히레가스는 240분.

저 사람은 지금 나의 4시간 노동을 삼키고 있구나.


한 끼 식사에 내 며칠분 임금을 지불하고는, 개나리처럼 발랄하게 거리로 사라지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보며, 입으로는 '또 오시라'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은 미소국처럼 가라앉았다.

  

어느 오후, 내실에서 동료 하나가 은밀한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이미 다른 알바생 둘이 더 모여 있었다. 그들은 뭔가 흥분된 표정이었다. 눈앞에 거의 새것과 다름없는 코돈부르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방금 나간 손님들의 테이블에서 거둬온 것이었다. 젊은 연인 둘이 들어와 각자의 메뉴에 더하여 코돈부르까지 별식으로 주문하고는, 한두 점씩 맛만 보고 남긴 것이다.


- 코돈부르 먹어본 적 없지? 우리 맛이라도 보자.


횡재한 목소리로 한 친구가 속삭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인 자들은 접시로 손을 뻗었다. 사건이 예상 못 한 방향으로 전개되자 나는 홀로 당황했다. 잠깐만! 정말 이걸 먹자고?


이런 작당이 없었다면, 당연히 그것은 잔반 양동이로 직행했을 것이었다. 마음에서 활화산이 터졌다. 한갓 튀긴 돼지고기 따위가 인간의 존엄성을 조롱하는구나. 돈을 내고도 먹지 않은 그들과, 돈이 없는데 먹으려는 나의 존재론적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상처받은 자존심은 발효된 반죽처럼 점점 부풀어 올랐지만, 다른 사람의 팔을 내 몸뚱아리에 가져다 붙인 듯 어느새 내 손가락은 마지막 남은 코돈부르 한 점을 집어 올려 냉큼 입속으로 밀어 넣고야 말았다.       


그 순간.

치즈와 피망이 어우러진 이국적 향미가 입속을 가득 채웠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충격적 맛이었다. 미각세포를 압도하는 현란한 맛의 향연에 예민하게 날뛰던 자의식이 동력을 상실했다. 세상에는 이렇게나 놀라운 음식이 많았구나. 비슷한 것만 먹으며 스무 해를 살아온 빈곤한 내 인생이 처음으로 가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메뉴판에서 반짝거리는 코돈부르 사진을 보며, 저것이 내 일당보다 비싼 몸이라고 철없이 분개했던 지난 날이 부끄러웠다. 내가 어디에 가서 몇 시간을 일한들, 과연 이런 감각의 빅뱅을 생산할 수 있을까... 교환가치의 환률에는 다 나름의 법칙이 있었던 것이다. 중구난방으로 오락가락하는 잡념이 센티멘탈 대마왕이었던 스무 살의 나를 뒤흔들었다.


1초 만에 비워진 접시를 개수대에 던지고, 알바생들은 올챙이처럼 제자리로 흩어졌다.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훔치며 홀로 나서는데, 거기 그 애가 있었다. 과 동기 준이었다.


- 어? 진짜 여기 있네?  


나를 발견하고 준은 해맑게 웃었다. 나는 크게 당황했다. 그를 여기서 마주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동기 중에서 유일하게 친해지고 싶은 남학생이었다. 그는 내가 반할 만한 ‘말’을 지닌 친구였다.      


한 동네에서 전학 한 번 없이 익숙한 자들과만 스무 해를 살아온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사람들의 말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은 말투도, 그 말이 품고 있는 감수성도 달랐다. 한 사람의 말은 육체를 지닌 생명체처럼 사람들 사이를 활보하며 존재감을 발산했다. 이유 없이 싸움을 거는 좀비 같은 말도 있었고, 친절한데 냉기가 도는 뱀파이어의 말도 있었다. 유쾌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허깨비 말도, 호의도 악의도 느껴지지 않는 유령의 언어도 있었다. 줄기차게 제 주장만 들이대는 독불장군의 말도 있고, 방심할 때마다 음담패설이 습격하는 쓰레기의 말도 있었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도무지 해독이 불가능한 먼 지방의 언어도 많았다.


준의 말은 처음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준과 대화를 나누면서, 아무에게나 습관처럼 비아냥거리는 내 말투가 얼마나 못난 것인지 나는 비로소 깨달았. 그의 말은 한결같이 다정했고, 또 다감했다.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단어와 문장 사이마다 공감과 배려의 온기가 은근하게 배어 있었다.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에도 잘게 다진 미소를 버무려 놓아서, 준과 대화를 하고 나면 어느새 내 마음은 마시멜로를 삼킨 듯 포근해졌다. 강의실 한 구석에서 준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딴짓을 하는 척하며 몰래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소녀처럼 보조개가 들어가던 그 얼굴이 아니라, 내가 사랑한 것은 정녕 준의 소리였다.

     

준은 자기가 즐겨 찾던 식당에서 내가 알바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반가웠다고 했다. 좋아하는 돈가스도 먹고, 좋아하는 친구도 만나니 일석이조 아니냐며 그는 웃었다. 익숙한 듯 메뉴판을 뒤적이면서도 준은 수시로 내게 빙그레 눈맞춤을 했다.


그 미소에 갑자기 나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어 버렸다.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작은 책을 읽으며 가만가만 식사하는 그의 우아함도, 신경 쓰지 말고 일하라 말해주는 그의 배려심도 어쩐지 모든 것이 못마땅했다. 왜 하필 오늘인가. 기름 튄 에이프런도, 납작하게 머리를 짓누르는 삼각두건도 부끄럽지 않았지만, 아직 내 입 속을 맴도는 그 진한 치즈의 잔향 때문에 나는 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다. 오늘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선물 같은 그의 방문을 그린라이트라 멋대로 해석하면서, 여름방학 내내 홀로 행복했을 것이다.


잠깐 할 얘기가 있다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결국 나는 그가 없는 다른 층으로 숨어 버렸다.  



     

2학기가 시작되었지만 준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일을 그만두고 나니, 꼬였던 마음은 슬그머니 풀어졌지만, 그와의 일이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찾아온 사람을 함부로 대했다. 만나자마자 사과할 생각이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쪽 팔리니까, 괜히 시시덕거리면서, 위악과 냉소도 조금은 섞어서...

그날은 미안했다. 너 같은 부잣집 도련님이 나같은 땅그지의 굴욕을 알 리가 있겠냐마는. 하하.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준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닿을 방법이 없었다. 휴대폰도, 메일 주소도 이 세상에 없던 시절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강의실 문이 열릴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살피는 것뿐.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다 보니 마음 속에 사막이 생겼다. 갈증으로 속이 타버리기 직전,  마침내 나는 허술한 핑계를 대며, 학과 조교에게 그의 부재를 물었다.


- 가족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더라. 몰랐니? 급히 결정되는 바람에 경황이 없다면서, 자퇴서도 팩스로 보내왔어.

 



별난 요리가 넘쳐나는 지금도, 돈가스의 아성은 여전히 굳건하다. 어린 아들의 돈가스 사랑도 빈곤했던 그 시절의 나보다 덜하지는 않다. 뭐 먹고 싶냐고 물으면, 장고 끝에 결국 '돈가스!'라 외치기 일쑤다. 와사비를 소스에 섞고, 라임즙을 뿌리고, 장국을 휘저으며, 돈가스 한 접시에 마냥 즐거워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면, 가끔 그날의 준이 생각난다.


강남에서 홀로 한강을 건너 명동까지 찾아온 그날, 그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유학도 아니고 이민. 회귀할 수 없는 완벽한 결별. 공유할 추억이 짧은 우리의 인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얼굴을 보며 하고 싶었던 그 어떤 말.


예상과 다른 나의 냉담함에 준비했던 말들이 방향을 잃고 흩어졌을 것이다. 나 역시 끝내 건네지 못한 말이 남아있다. 기다려도 닿을 수 없었던 회한의 어휘들.


그 다정했던 그의 모국어는 지금도 내내 무사할까.

이제는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익숙하려나.

이국의 언어도 그때 그 말들처럼 여전히 따뜻할까.


궁금하지만 답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니다.




 * 이미지 - www.siksinh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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