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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작가 Oct 08. 2023

고추밭에서 고춧가루가 되기까지

‘주말농장’, ‘텃밭이 있는 타운 하우스’ 

육지에 살 때 일산이나 파주 쪽으로 가다 보면, 국도변에 걸린 현수막 광고의 문구들이었다. 

이런 문구들은 그나마 부지런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광고들일 것이고, 

실상 서울에 살다 보면 집 근처의 공원이나 남산, 인왕산 같은 곳을 오를 때면 숲을 접할 기회가 생긴다. 

10대나 20대 때에는 녹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이 좋았고, 낮보다는 밤이 좋았던 것 같다. 

30대에 접어드니 일부러 시간을 내서 산이란 곳도 가보고, 숲길을 찾아 걷기도 하고, 

화원에 가서 화분도 사게 되더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식물은 마트에서 사 먹을 줄만 알았던 평범한 서울사람.

그랬던 내가 서귀포에 정착하면서, 농사란 새로운 분야를 접하게 되었다. 


효돈집 마당 한편에 곡괭이와 삽으로 작은 텃밭을 만들긴 했지만, 

정작 모종을 심고, 잡풀을 뽑고, 비료를 준 것은 엄마의 몫이었다. 

5평 남짓한 텃밭에서 따온 상추, 고추, 무쌈잎, 방울토마토는 세 식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 큰 수확을 얻었다. 

서귀포의 겨울이 춥지 않아서일까, 

12월, 1월에도 쌈채소를 간간히 따오시는 엄마를 보면서 마법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텃밭 농사 1년 차를 보내고, 우연히 고추농사를 지어볼 기회가 생겼다.      


서귀포에서 집수리를 다니다 보면, 생활은 육지에서 하지만 노후에 살기 위해서건, 

투자 목적 이건 농지를 미리 사놓은 육지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일 년에 몇 번 내려와 노후된 집수리도 하고, 정글이 된 밭을 정리하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별도로 임대료를 받지 않고 집관리, 밭관리를 하며 

땅을 쓸 사람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종종 받는다. 

그렇게 알게 된 밭 700평. 원래 이 밭의 집수리는 우리가 맡아서 해 주었고, 

집 옆의 밭 100평 정도는 사장님이 고구마나 쌈채 등을 심어 관리하고 계신 땅이었는데, 

500평 정도의 땅이 너무 지저분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그 방치된 땅을 효돈집의 J형님이 맡아서 농사를 짓기로 했다. 

버스기사인 J형님의 근무는 하루 출근, 하루 휴무가 보장된 업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J형님 또한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었기에 사장님과 내가 일이 없을 때 도와주기로 하고 일을 벌였다.      

J형님의 오랜 염원이었던 농사꾼 되어 보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중고마켓에서 밭 관리기를 구입하고, 땅속에 묻고 물을 데어줄 파이프와 부속도 샀다. 

정글 같던 500평의 땅에 잡풀을 제거하고, 돌을 골라내고 땅을 파서 파이프를 매설하고, 호수를 연결해 땅밑으로 물을 줄 수 있는 관로를 만들고 골을 파서 두둑을 쌓아 주었다. 

검은색 비닐을 두둑에 맞춰 씌워주고, 간격을 맞춰 모종을 심을 구멍을 미리 내주었다. 

간략히 설명했지만, 고추를 심기 위한 밑작업만 석 달이 걸렸다. 

석 달이 지났을 뿐인데 새카맣게 탄 J형님의 몸은 어느새 베테랑 농사꾼처럼 보였다. 

육지에서 좋다는 고추모종을 받고, 4~5일 정도를 마당에서 햇볕과 물을 주며 적응할 시간도 가졌다. 


드디어 고추모종을 심는 D-day 날이 왔다. 

주 관리인 J형님과 동료분들. 

부 관리인 나를 포함한 4명의 농부들이 금쪽같이 귀한 고추모종을 조심조심 심었다. 

태어나서 처음 심어 보는 고추모종이 너무 여려서 행여 부러지진 않을까, 

병아리 만지듯 옮겨 심으려니 등짝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애지중지 심은 고추모종이 2달이 지나자 제법 커져서 미리 박아놓은 고춧대에 묶어줄 만큼 자랐고, 

어린 풋고추는 적당히 맵고 연한 것이 된장에 찍어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는 밥도둑이 되었다. 

그렇게 쑥쑥 자라던 고추가 태풍을 만나 꺾어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했지만 

J형님의 보살핌 덕으로 잘 넘기고, 이제는 빨간색 성인고추로 익어가고 있다. 

이틀에 한번 꼴로 익은 고추를 따주고, 병든 고추를 솎아주고, 비가 오고 나면 약도 쳐주고, 

잡풀도 제거하면서 J형님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도 쉬는 날이면 밭에 나가 풀도 베고, 고추도 솎아주고 온다. 

갈 때마다 빨갛게 익어있는 고추가 달리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다.      


정성 들여 딴 고추를 깨끗이 씻고, 닦아서 말리는 일도 J형님의 몫이다. 

요즈음 J형님 집 마당에 가득 찬 붉은 마른 고추를 보면, 본업이 버스기사 인지 농사꾼인지 잘 모르겠다. 

음식장사를 할 때 아까운지 모르고 썼던 고춧가루가 이렇게 공들여 만든 것인지 알지 못했다.

이렇게 공들인 고춧가루를 앞으로 먹을 수나 있을까 싶다.

물감으로 물을 들여도 나오지 않을 고운 색으로 예쁘게 말린 고추를 다음 달이면 

고춧가루로 빻을 수 있을 것이다. 


봄부터 시작한 고추농사가 결실을 맺는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틈틈이 거들기만 했을 뿐인데, 마당에 말려놓은 빨간 녀석들이 자식처럼 여겨진다. 

저 녀석들을 판 돈으로 무얼 살 수 있을까?

그냥 팔지 말고 두고두고 먹자고 J형님께 졸라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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