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yd Mar 09. 2022

Bottletalk. 한 병 정도의 이야기. 12

fiction. 천일의 산장

(fiction) Bottle 12. 천일의 산장 



“나만 믿어 태오.”

만난 지 천일이 된 기념으로 뭘 하고 싶느냐고 윤아에게 묻자, 그녀가 답했다. 윤아는 자신이 모든 것을 계획하겠으니 맡겨달라고 말했다.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제대로 준비 하고 있는 거 맞지?”

그 이후, 내가 물을 때면 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구진 미소를 면면히 지은 채. 


윤아는 생동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높은 채도와 명도의 붉고 푸르고 노란, 톡톡 튀는 색조합이 사람의 모습을 했다면 그게 윤아였으리라. 그런 윤아가 저런 표정을 할 때면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일이 터졌고, 나는 그 일들을 버거워 하면서도 기분 좋은 기억으로 마음 한켠에 새기곤 했다.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걸까, 몇 번을 물어도 윤아는 

“오빠. 그만 걱정해. 정말 즐거울 거야.”

라고만 대꾸했다. 그래서 나는 천일 데이트에 대한 걱정을 그만 하기로 했다.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1박 2일로 다녀올 거니 시간을 빼달라는 부탁에도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그리고 그 날이 코앞에 도달했다. 원래라면 윤아와 출발부터 함께 할 예정이었는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 정오가 지나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윤아는 먼저 그 곳에 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로 했다. 

“어디로 가면 돼?”

“문자 보냈어.”

윤아가 보낸 문자에는 강원도 홍천의 어느 산 주소가 찍혀 있었다. 불길함이 엄습해왔다. 나는 자연, 특히 산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윤아는 자연을 사랑하고 야외활동을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주말을 등산이나 낚시, 야외활동으로 보내는 것보다 깔끔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주소만 산인 거지? 가면 아무것도 없고 그런 거 아니지? 나 뭐 사갈까?”

“다 있어. 제발 그냥 와. 오기만 해.”

윤아가 준 주소의 정체는 산 초입의 캠핑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숲 안으로 20분 가량이나 들어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계곡 물이 흐르고 울창하게 숲이 우거진 곳 한가운데 미국 영화에서나 보던 통나무 산장이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무들은 높고 잎과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서 오후 세시인데도 어둑한 곳이 제법 있었다. 산장 앞 진흙탕에 차를 대자 산장 안에서 윤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바퀴가 진흙탕 속에서 헛 돌아 차에 흙이 튀었다. 나는 대충 차를 대고 시동을 껐다. 

“이게 뭔지 설명해 봐”

“태오, 냄새 맡아봐. 공기부터 서울이랑 완전 다르지 않아?”

윤아는 총총거리며 내게 뛰어와 내 품에 안긴 채 말했다. 내 말은 듣지도 않은 게 분명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윤아는 나를 채근했다. 어서 숨을 들이마셔 보라는 거였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축축히 젖은 흙 사이사이에 곤죽이 된 나뭇잎들의 푸릇한 풀비린내와 계곡에서 올라오는 물 냄새, 이끼 냄새, 그리고 나무들이 뿜어내는 냄새가 코끝을 알싸하고 기분 좋게 맴돌았다. 공기가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윤아는 여봐란 듯 내 얼굴을 보고 있다가 내 손을 잡아 끌었다. 

“태오. 트레이닝복 안 가져왔지?”

“옷은 지금 입은 거랑 잠옷 밖에 없지.”

“그럴 줄 알고 내가 의상도 준비했지.”

“무슨 소리야…?”

등골이 오싹한 소리였다. 윤아는 신이 나서 산장 안으로 들어갔다. 산장 안은 완전 미국식이었다. 신발을 벗지 않고 생활하는.

“도대체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아낸 거야?”

“여기 학교 선배 아버지가 지으신 곳이래. 오늘만 빌렸어. 멋있지?! 완전 미국식이야.”

“책이나 영화 보면 이런 데서 살인 사건 일어나는 거 알지?”

“태오, 내가 아직도 서윤아로 보여?”

무딘 빵 칼을 들고 눈을 게슴츠레 뜬 윤아가 장난을 쳤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나를 위한 트레이닝 복이 침대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트레이닝 복 입을 일이 뭐 있어?”

“뭐 있긴, 산에 다녀와야지!”

이쯤 되니 화가 조금씩 치밀어 올랐다. 만난 지 천일이 되었는데, 제일 싫어하는 산행을 이벤트로 준비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난 안가.”

“태오. 여기 경치 정말 끝내준단 말이야. 보여주고 싶다고. 나랑 한 번만 갔다 와.”

침대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온 윤아는 내 무릎위에 손을 얹고 쪼그려 앉아 나를 올려다봤다. 서윤아의 비기, 장화신은 고양이 표정! 윤아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면, 나는 내 속마음과 다른 선택을, 즉 윤아가 하자는 것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날도 그랬다. 내가 옷을 갈아입자 윤아는 신이 났지만…. 나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못이기는 척 윤아의 손을 잡고 숲으로 나갔다. 전날 비가 와서 질척이는 흙과 낙엽, 여기저기 꼬이는 벌레, 험한 길에 무거워지는 발걸음.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지만 윤아를 따라갔다. 그래도 서윤아에게 양심은 있어서 산꼭대기까지 오르지는 않았다. 산 중턱에 서서 지는 해를 보며 윤아에 대한 화를 잠깐이나마 잊었다. 

“너무 좋지? 오길 잘했지? 나, 이 풍경을 꼭 태오랑 같이 보고 싶었어.” 

내 속도 모르고 윤아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저 숲과 그 너머 바다 바깥으로 낮아지는 태양을 보고 종알거렸다. 주황빛이 은은히 퍼진 노을에 빛나는 윤슬이 눈이 부셨다. 


우리는 서둘러 산장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해가 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몇 번을 넘어질뻔 했고, 실제로도 넘어졌다. 윤아가 나를 잡으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나는 진창속에서 굴렀다. 

“오빠 괜찮아?”

윤아가 달려와 나를 잡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윤아의 손을 뿌리쳤다. 

“내가 산 싫어하는 거 알면서, 굳이 이런델 천일 기념일에 데려오냐? 진짜 너도 너다.”

윤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어둠속에 윤아를 두고 더 어두운 숲을 걸었다. 뒤에서 자박거리며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 시커먼 형태의 나무 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윤아는 먼저 달려가 문을 열고 불을 켰다. 나는 산장안에서 차 키를 꺼내와 차문을 열었다. 차 안에는 조금 시들어 고개 숙인 꽃다발과 윤아에게 주려고 산 목걸이 케이스가 있었다. 나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고는 그것들을 꺼냈다. 산장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산장 앞에 달려 있는 팻말이 눈에 띄었다. ‘천일 산장’ 나는 모르는 척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식탁 위에는 케이크와 리본으로 장식한 샴페인과 와인이 놓여 있었다. 

“여기, 선배 아버지가 어머니랑 결혼하고 천일이 된 날 직접 짓기 시작하신 거래. 천일은 이제 시작이다라는 의미로 천일 산장이라고 이름 붙이신 거래. 그래서 우리한테 딱인 거 같아서…”

나는 손에 쥔 꽃다발과 선물을 식탁 앞에 내려놓으려고 발을 뗐다. 화를 낸 것을 사과하고 천일 이벤트를 나름 수긍해줄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흙투성이인 신발 때문에 자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내 발에 붙어 있던 거대한 덩어리가 내 얼굴까지 절묘하게 튀었다. 

“풋….”

윤아의 웃음에 화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얼굴에 묻은 것을 떼어보니 글쎄, 동물의 똥처럼 생긴 것이 아닌가! 

“야! 이거 똥 아니야? 아, 진짜 더러워서!”

윤아는 성큼성큼 걸어와 내 손에 붙은 덩어리를 덥석 쥐었다. 

“어우, 야, 윤아야 하지마!”

하지만 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덩어리의 냄새를 맡았다. 

“똥! 멧돼지 똥이다!”

윤아는 덩어리를 내게 들이밀며 날 놀려댔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자 윤아는 술래잡기하듯 나를 쫓아왔다. 좁은 집 안에서 도망갈 구석은 없었다. 내가 기겁을 하며 구석에 쭈그려 앉자 윤아는 손에 쥔 것을 내게 천천히 들이밀었다. 나는 눈을 감았고… 쪽! 

눈을 뜨자 내 뺨에 입을 맞춘 윤아가 활짝 웃고 있었다. 

“태오. 이 멍청이. 풀냄새 이끼냄새가 섞인 흙냄새 나는 것도 몰라? 흙이야 흙! 쫄아가지구.”

윤아는 흙을 밖에 내던지고는 구석에 여전히 쭈그러든 나를 보며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함께 웃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웃음을 꾹 참았다. 윤아가 웃고 싶으면 웃으라고 몇 번을 재촉하고 나서야 나도 윤아와 함께 키득거릴 수 있었다. 

저녁을 먹으며 샴페인을 마시고 와인을 열었다. 말린 장미와 라즈베리, 바닐라와 체리의 향이 풍성하게 퍼지는 와인이었다. 산장 특유의 냄새와 창밖에서 불어오는 흙내음, 숲의 향과 함께 와인향이 뒤섞여 매우 인상적인 조화를 만들어냈다. 마치 나와 윤아의 조합처럼.

“태오, 자?”

“아니.”

“우리 다음엔 바다로 갈까? 무인도나.”

“제발, 천일 산장으로도 족해.”

“이제 시작일 뿐이야. 사랑해 태오.”

나는 윤아를 품에 꼭 안았다. 이 사랑스러운 머리통에서 다음 행선지로 너무 과격한 곳이 나오지 않길 바라며.  






와인 정보


최근에 마신 와인중 가장 맛있는 것 중 하나였다. 로베르토 보에르지오의 랑게 네비올로는 이것이 세 번 째인데, 항상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곤 했었다. 

입안에서의 텍스쳐는 마치 벨벳같았고 향도 엄청났다. 말린 장미와 숲 이끼, 라즈베리 맛과 바닐라의 향이 뒤섞였고 마시고난 뒤에는 빵껍질 같은 맛이 입에 살짝 남아 또 마시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든 와인이었다. 버섯향이 도드라지는 음식과 먹으면 매우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나무가 높게 자란 숲, 나뭇잎 사이로 미치는 따스한 태양, 흙, 지렁이, 버섯, 이끼가 있는 풍성한 토양, 그리고 그 속에서 풍겨오는 잘 익은 베리열매의 향이 절로 심상에 그려지는 맛이었다. 

그래서 도시적인 남자와 자연을 좋아하는 여자의 이야기로 그려보면 어떨까 했고, 이렇게 천일 산장의 이야기가 탄생하게 되었다. 


Roberto Voerzio Langhe Nebbiolo 2018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구매처 : Hera’s Vineyard (하남 헤라즈빈야드)


매거진의 이전글 Bottletalk. 한 병 정도의 이야기. 1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