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rin Jan 05. 2023

우리 무조건 행복하자구요.

부제> 늦어버린 연말결산

스포티파이는 올해 동안 내가 어떤 노래를 많이 들었는지 올해도 잊지 않고 알려주었다. 연말결산이 너무 진부한 거 같아 하지 말까 하다가 생각해보니 뭐라도 기록해둔 게 없어 써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생각해보니 시작은 했는데 뭔가 제대로 끝맺음을 해둔 게 없어 조금 속상해지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려고 한다. 하지만 시도를 해보고 계속하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 진전인가.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이랑과 이가라시 마키오가 주고받은 편지를 기록한 책인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이다. 평소에 텍스트로만 책을 읽었는데 오디오북으로 실제 이랑 님이 녹음을 했던 부분을 듣고는 바로 결제해서 들었다. 집에서도 듣고 길을 걸으면서도 들었는데 역시 낭독을 잘하는 사람의 책 읽기는 집중이 잘된다. 이랑 님은 기억하기 위해서 기록한다고 했는데 난 반대로 그 많은 것들을 다 기억하는 게 싫어서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기록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뭔가를 기록하고자 하면 이젠 너무 게을러진 탓에 밀리거나 너무 오래 걸린다. 만약 나도 기록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잊고 싶지 않았던 좋았던 순간도 나는 다 기억할 수 있었을까?


올해는 수영을 시작했고 뜨개질도 시작했다. 마음이 모나 져서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기도 했고 당장 이 순간의 무기력함을 어찌해야 하나 두려웠던 시간도 지났다. 근처로 혹은 조금 멀리 여행을 다녀왔고 덕분에 멋진 풍경을 또 가득 담아 올 수 있기도 했다. 대부분의 일상이 일과 집을 반복하는 좁은 시간이 또 빠르게 지나갔다. 작년 연말은 남반구의 여름 속에서 출퇴근길을 보냈는데 올해는 거의 4년 만에 겨울을 맞이하고 내리는 눈을 맞았다. 크리스마스에도 연말에도 일을 했던 거 같은데 올해도 그렇게 보내고 있다. 이젠 나이가 들고 종종 일이 힘들다 느껴지니 공휴일에는 그냥 좀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대부분의 연말에는 일을 했었다. 크리스마스도 후다닥 끝나고 그러다가 연말이 지나고 새해가 되곤 했었다. 서른 후반에 와서도 같은 시간이 반복되었다.


여기까지가 작년의 내가 연말결산을 위해 써둔 글이다. 일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쓰기 시작했는데 계속 들어오는 손님들을 보자니 영 쓸 마음이 생기지가 않았었다. 그러고선 연말이 다 지나갔다. 정말로 일을 많이 했고 내 근무시간을 들은 친구들은 모두가 놀랐다. 연말에도 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와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일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지독한 한국인 사장을 욕했고 밀려들어오는 손님들이 싫어졌다. 내가 이렇게 인간을 싫어하면서 일을 해야 할까 싶었다. 대부분의 주방에서 요리가 좋아 일을 시작했다가 떠나는 이유는 같다. 과도한 근무시간과 적은 급여. 일의 능률을 위한 근무시간 조절과 인력 구성을 신경 쓰는 사장들이 얼마나 될까. 모든 것은 돈과 연결되어 있고 인건비를 왜 이리 아까워하는 것인지 다시 한번 속이 답답해지는 것이다.

아무튼 최악의 연말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연말이었지만 마지막 날 생긴 휴무 하루가 날 살렸다. 물론 그날도 업무 연락을 받고 제법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말이다. 기억에도 없는 마지막날의 여유보다는 좋은 자리를 갖고 싶어 친구들을 불렀다. 아침부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장을 보고 밀린 집안일도 하고 반나절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오랜만에 꽃도 사서 꽂아보고 기분이 제법 좋았다. 이날은 리코타 치즈 샐러드와 토마토와 야채를 넣은 수프 그리고 컬리플라워를 넣고 만든 세비체, 버섯리조또와 연어스테이크를 준비했다. 좀 더 그럴싸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다들 맛있게 먹어줘서 행복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일이 즐거운데 일이 되면서 싫어질 수 있다는 게 좀 짜증스러운 부분이다. 어떻게 하면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지속가능한 일로 유지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이것이 큰 숙제가 되었다.

아무튼 새해가 되었으니 뭘 실천해볼까 하다가 다이어리 하나를 샀다. 사실 몇 번 실패를 하고 다시는 다이어리를 사지 않았는데 왜인지 이번에는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하나 사보았다. 신나서 여러 가지 다이어리를 보다가 가장 마음에 드는 걸로 샀는데 가격을 확인하지 않고 사서 계산 후 조금 놀랐다.

그래, 새해에는 덥석 집은 물건을 사지 말고 가격을 확인하자.


아, 그리고 또 하나. 사려던 물건이 이게 맞는지 꼭 제대로 확인하고 사자. 버터를 사려다가 바로 그 옆에 있는 언솔티드 마가린을 그냥 사 온다던가 베이컨을 사러 가서 메이플 시럽에 절여진 베이컨을 집어오는 일은 이제 없도록 하자.

생각보다 새해에는 좀 더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정리해보자면 나는 다이어리를 꾸준히 쓸 것, 물건을 살 때 신중할 것, 그리고 책과 영화, 영어공부를 조금씩 매일 하고 기록할 것. 이 정도가 될 거 같다. 뭔가를 읽고 보고 경험하는 일들이 줄어가면서 내 세계가 좁아지는 기분이 자주 든다. 그것들이 늘어나기 위해서는 좀 더 의욕적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으니 말이다. 어제는 영양제를 더 사 왔다. 뭔가 나이를 실감하는 기분이 더 자주 드는 거 같기도 하다. 올해는 좀 더 정돈하고 단단한 마음을 일궈내야겠다. 그리고 나에겐 4년 만의 휴가가 곧 다가온다. 그걸로도 새해는 충분히 즐겁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만난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